홍계남장군고루비. 임진왜란 지난 지 153년, 홍계남 장군 사망한 지 148년 지난 후 민중들이 장군을 잊지 못하고 세운 비석이다. 홍자수, 이덕남 장군과 의병들이 진을 쳤던 미양면 구수리, 서운면 신기리와 양촌리 경계 고갯마루에 있다.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됐다.
본지(자치안성신문)가 지난 1261호에 이어 의병장 홍계남 장군(1564~1597)을 <안성시지(2011년 11월)>와 <안성 향토사료집(안성문화원. 2003년 6월)>, <홍계남 장군 고루비 안내판>, <편역 안성기략(2008년)>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홍계남 장군은 의병장 홍자수 장군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사실상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 관료(공무원) 등용문이었던 과거제도(科擧制度)를 통한 관료 진출이 아닌 왕을 지키는 금군(禁軍)의 병사로 시작했다.
처음 “... 금군(禁軍)에 소속되었다”가 “1590년(선조 23)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通信使)의 군관(軍官)으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군관(軍官)은 “조선 시대에, 각 군영과 지방 관아의 군무에 종사하던 낮은 벼슬아치” 일반군사보다 높은 지금의 장교(將校)급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26세에 처음 일반군사보다 높은 직책을 받은 것이다.
이후 왜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파견된 경상도 순변사(巡邊使) 이일 휘하에서 싸우다 상주에서 패해, 충주에 있던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 장군과 충주 탄금대에서 싸웠으나 역시 패했다. (한민족백과사전)
<안성시지>에는 이후 임금을 따르기 위해 서울에 갔지만 이미 어가(御駕)가 몽진(蒙塵)을 해 고향 안성으로 돌아와 앞서 언급한 엽돈령 전투 등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아버지 홍자수, 고종사촌 이덕남과 의병장(義兵將)으로 활동했다.
지난 호 마지막에 언급했던 <홍계남장군고루비(洪季男將軍古壘碑)>는 미양면 구수리 산87번지에 남아있다. 여기서 고루(古壘)는 옛 보루로 진(陣)을 치던 곳이고, 고루비(古壘碑)는 진을 치던 곳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홍계남장군고루비>는 의병장 홍계남 장군을 기리기 위해 부친(홍자수)와 고종사촌(이덕남)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진을 치던 곳, 지금의 미양면 구수리 산 87-1번지에 세운 비석이다.
이곳은 홍계남 장군의 태어난 서운면 양촌리 그리고 서운면 신기리, 미양면 양변리 동변 마을 경계 인근 산(山) 작은 고갯마루로 이전에 목촌(지금의 미양면 구수리 일원)이라 불리던 곳이고, 고종사촌 이덕남 장군 묘 인근이다.
1597년 영천에서 34세로 사망 후 평산(平山) 총유산 아래 묘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홍계남 장군이 사망한 지 148년이 지난 1745년(영조 21)에 고향 안성에 그의 뜻을 기리는 고루비가 세워진 것이다.
<안성시지>는 <홍계남장군고루비(洪季男將軍古壘碑)>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홍계남 장군을 기리기 위해 그의 군대가 진(陣)을 쳤던 옛 성루 터에 세운 비석이다. 고루(古壘)란 옛날에 전투를 벌였던 ‘작은 성루’라는 뜻이다.>라고.
그리고 <이재(李縡, 1680~1746)가 지은 비문에 의하면 “안성군 남쪽 15리쯤에 있는 목촌(木村) 마을의 옆에는 우뚝 솟은 산이 있는데, 마치 흙을 쌓아 만든 듯하며 높이가 몇 길이나 된다.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옛날 홍계남 장군의 군대가 진을 치던 작은 성루라고 한다. (……) 장군이 죽은 지 140여 년이 지나 고을 사람들이 장군의 공을 회고하고 서로 의논하여 돌을 다듬어 그가 싸우던 지역에 비석을 세웠다. 내 집이 이웃에 있으므로 문헌에 의거 하여 이를 지었다”라는 내용이 있어 이 같은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이재(李縡)라는 인물이고 그 자신의 살던 용인에서 이웃 안성 민중들이 140여 년 전 홍계남 장군을 잊지 않고 그 활동을 기리는 비석 세웠고 자신은 비석에 새긴 비문을 문헌에 의거 지었다는 것이다.
그 이재(李縡)는 이웃 동네 지금의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 노곡(노루실)이 고향으로 숙종 대부터 영조 대까지 노론의 중신이자 학자로 많은 저술을 편찬했고, 대사헌, 대제학을 지내기도 했다.
말년인 영조 때 용인 선영에 내려와 머물며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여러 문인과 독서를 강학했던 인물로 사후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신위가 배향됐지만,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한천서원이 사라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지난 지 153년, 홍계남 장군이 사망한 지 148년이 지났지만,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민중과 함께 위기의 지역과 국가공동체를 지켜냈던 장군을 잊지 못할 만큼 안성과 용인 등 인근 지역 민중에게 업적을 추앙(推仰)받았기에 고루비가 세워진 것이다.
함께 싸웠던 민중이 잊지 못하고 148년 만에 비석 세웠다
<안성시지>에 따르면 <홍계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홍자수와 에 형과 함께 의병을 모아 목촌(木村, 미양면 구수리 인근)에 쌓은 성루를 중심으로 활약하여 많은 전승을 올렸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수원판관 겸 기호양도조방장)에 제수 되었다.>
<편역 안성기략>의 홍계남 장군 고루비 편에서는 홍계남 장군은 고향에 돌아온 다음 <(홍)자수가 진천 엽돈령에서 적과 대진(對陣)하고 있었을 때 장군이 돌아와 협공을 펴서 적을 격파한 다음 돌아와 대장기를 세우고 북을 울리니 수일 내에 그를 따르는 자가 3,000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목촌에 보루를 쌓아 주둔하였다. 적들은 죽산, 양지, 용인에 세력을 펴서 세 개의 진지를 구축하였다. 장군이 왔다 갔다 하며 공격하여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이에 적들은 크게 꺾여 양성 서쪽과 내포 남쪽의 백성들은 모두 편안히 지낼 수 있었으니 이것은 실로 장군의 힘이었다.>
이는 <선조실록>에서도 확인됐다.
서운면 청용리와 진천군 백곡면을 넘어가는 지금의 34번 국도 고개인 엽돈령(재)에서 처음 30여 명의 의병으로 홍자수, 이덕남 장군과 왜적을 무찌르자 3,000명이나 되는 의병이 몰려왔고, 그들과 목촌(미양면 구수리)에서 진을 치며 미양면과 서운면뿐만 아니라 용인, 양지, 죽산, 양성 등 인근에서 침략한 일본군에 맞섰다는 것이다.
앞서 홍계남 장군 고루비 비문을 지은 이재의 고향이자 말년에 지내던 곳이 지금의 용인이었고, 언급된 홍계남 장군의 활동 지역 중 ‘양지’는 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을 가리키고 있어 이재(李縡)가 ‘이웃’으로 표현했던 것은 거리의 가까움도 있지만, 안성의 홍계남 장군과 의병을 용인 사람으로 잊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한 안성 의병장 홍계남, 이덕남, 홍자수 장군은 임금인 선조가 파죽지세로 쳐 올라오는 일본군을 피해 의주로 피해지만, 바다를 지키는 이순신 장군과 전국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과 의병장이 함께 희생을 감내(堪耐)하고 싸워 결국 임진왜란이 극복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편역 안성기략>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3,000여 명과 함께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홍계남 장군이 두려워 적들이 ‘홍장군’이라 부는 위세를 떨칠 즈음 <임금이 용만(의주의 옛 명칭)에 계시면서 장군의 승전 첩보를 들으시고 특별히 장군에게 수원 판관(判官)을 제수하셨으나 미처 관아에 부임하기도 전에 홍자수 장군이 죽산에 주둔한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었다. 장군의 5형제가 칼을 빼어 들고 진중에 돌입하여 적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돌아왔다. 적은 오로지 앉아서 바라만 보며 소리칠 뿐이었다. (……) 임금께서 특별히 명하여 기호양도조방장을 제수하시고 계급을 절충으로 올렸다.>
여기서 판관은 감영이나 유수영 등 큰 고을에 둔 종5품 관직이고, 조방장(助防將)은 주장(主將)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이며, 절충(折衝)은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준말로 조선 시대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 명이다.
홍계남 장군이 홍자수 장군의 서자(庶子) 태어나 금군의 병사로 들어가 1590년 통신사의 군관(軍官, 장교)으로 발탁된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을 받고 파견되던 순변사(巡邊使. 종2품) 이일과 신립 휘하에서 싸우다가 패하고 고향 안성에서 부친 홍자수 장군과 고종사촌 이덕남 장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그 공을 인정받아 수원판관(종5품)에 이어 절충장군(무신 정3품 당상관)에 제수(除授) 된 것이다.
서자 출신으로 사실상 과거(科擧) 등 양반 관료의 길이 막혔지만, 의병을 일으켜 세운 공으로 무신 정3품 당상관에 이르며 신분의 벽을 뚫은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외 정규군이 속수무책으로 침략한 왜적에 패퇴(敗退)해 임금인 선조가 의주로 피난까지 가는 상황에서 지역과 국가공동체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과 의병장에 의해 지탱될 수밖에 없게 되자 국가인 조선이 그들 의병장을 국가 조직으로 복속시키는 과정으로 분석된다.
어쨌든 서운면 양촌리에서 서출(庶出)로 태어난 홍계남 장군이 서운면 청용리에서 진천군 백곡면을 넘어가는 고개인 엽돈령(재) 전투를 계기로 모인 3천 명의 의병과 용인과 안성 등 기호지방(경기도와 충청도)에서 조선의 정규군이 떠난 자리에서 일본의 군의 후방을 교란해 왜군의 보급선에 타격을 입힌 공로, 뛰어난 재주로 정삼품 당상관 무관 품계를 받으며 신분의 벽을 허문 것이다.
한편, 홍계남 장군 고루비는 <사각형의 비석 받침돌과 지붕돌을 갖춘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을 취하고 있다. 비신(碑身; 글씨를 새기는 부분)의 높이는 170㎝이고 폭은 58㎝이며 두께는 45㎝이다. 비문은 앞서 얘기했던 이재(李縡)가, 글씨는 당대의 명필인 민우수(閔遇洙)가 장군의 행적에 걸맞게 힘차게 썼으며 전액(篆額 ; 전서체로 비석의 이름을 새긴 부분)은 유척기(兪拓基)가 썼다. 건립 연대는 1745년(영조 21)이다. 비석을 보호하고자 1977년 비각을 세웠다.>
여기서 유척기는 안성 출신으로 대덕면 건지리에 묘가 있으며 정조의 왕세손 시절 스승이었고, 정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이끌었으며, 연암 박지원의 안성을 배경으로 한 ‘허생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 유언호의 족질(5촌 종숙)이고, 영의정을 지냈다.
홍계남 장군 고루비는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됐다. (다음 호 계속)
※ 1261호 관련 보도 제목 “의병장 홍사수 장군 서자(庶子)였던 의병장 홍계남 장군” 중 ‘홍사수’를 ‘홍자수’로 바로잡습니다. 전화 주신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