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남 장군이 외삼촌 홍자수 장군과 외사촌 홍계남 장군이 함께 진 치고 싸우던 고갯마루인 미양면 구수리 85번지에 잠들어 있다. 묘는 경기도 기념물 26호로 1975년 지정됐다.
매년 6월 1일은 국가가 법으로 정한 법정 기념일 중 하나인 ‘의병(義兵)의 날’이다.
‘의병의 날’은 2008년 8월 경남 의령군수 등 1만 5,586명이 ‘호국의병의 날’ 기념일 제정을 국회에 청원, 2010년 2월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며 제정·공포됐다.
6월 1일로 의병의 날을 정한 것은 임진왜란 시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6월 1일로 선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병의 날이 제정·공포되고 제1회 의병의 날 기념식이 경남 의령에서 열린 이래 정부가 매년 의병이 일어난 지역을 순회하며 열리다 올해는 14년 만인 6월 1일 다시 경남 의령 곽재우 장군의 위패가 봉안된 충익사에서 열린다고 한다.
앞서 1259호에서 밝혔지만, 의병은 국가공동체에 침입한 외적을 국가가 공식 군대를 통해 해결하지 못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중들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국가공동체와 지역공동체 그리고 구성원인 국민(백성)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만든 민중의 군대 또는 그 군대에 소속된 병사를 말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의병(義兵)은 관군(官軍)에 대비(對比)됐고, 조선 시대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韓末)의 1, 2차 의병으로 크게 구분되고, 이후 동학으로 이어진 의병의 맥(脈)은 국가공동체인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기 3.1운동을 거쳐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안성에도 임진왜란 때 의병이 있었고 이들 의병을 이끈 의병장 홍자수·홍계남·이덕남 장군이 있었다.
그중에 특히 의병장 이덕남 장군과 홍계남 장군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남양 홍씨 문중과 영천 이씨 문중 그리고 서운면민이 임진왜란 때 국가와 지역인 안성 공동체 지키고 민중의 생존 위협과 수탈을 막아주었던 두 장군이 활약하던 고갯마루에 위패를 모신 사당(祠堂) 진양사(陣陽祠)를 짓고 1986년부터 매년 춘향제를 올리고 있다.
진양사 춘향제를 올리는 남양 홍씨와 영천 이씨 문중과 함께 한 서운면 유림이 2018년 3월 ‘진양사 보존 추모회’로 바뀌었고 최근 회장을 맡은 정승훈 회장이 두 장군의 추모 사업 활성화를 위한 적극적인 행보에 따라 지난 호에 두 장군에 대한 정리를 예고한 바 있다.
그중에 이번 호에서 의병장 이덕남 장군을 <안성시지(2011년 11월)>와 <안성 향토사료집(안성문화원. 2003년 6월)>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영의정 유성룡이 이순신과 함께 선조 임금에게 천거
이덕남 장군은 조선 선조 때 의병장으로 자(字)는 윤보고 본관은 영천으로 참봉(參奉) 이수인의 아들로 서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조실부모한 후 외삼촌인 우찬성(종일품) 홍자수에 의탁해 자라다 20세 때 무과에 급에하여 종3품 훈련원 부정을 역임했다.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같은 마을인 서운면 양촌리에 사는 외삼촌 홍자수 슬하에서 자라 무과에 급제해 무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임금 선조가 영의정 유성룡에게 무신 당하관 중 장수(將帥) 재목을 추천하라 명하자, 이순신 장군과 함께 천거되며 정3품 어모 장군 훈련원정으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직전에 관직에서 물러나 안성에 있을 때 왜란이 일어나자, 외숙인 홍자수 장군과 외사촌 홍계남 장군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고, 농기구를 녹여 무기를 만들고 의병을 훈련시켰다.
그러다가 왜군이 (충북) 진천의 엽돈령 고개(청룡저수지 인근)를 넘어 안성으로 진군한다는 첩보를 듣고, 선발대 3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서운면) 청룡리의 동구 밖에서 왜적 10여 명을 사살하자 주위 청장년들이 의병으로 자원한 자가 3,000여 명에 달했다.
이후 죽산·용인·양지 등지에서 일본군이 북상하지 못하고 죽주산성에 집결하자, 죽산의 좌찬령으로 달려가 왜적을 격퇴시켰으나, 죽주산성에 집결한 왜적의 기습 공격을 받아 외삼촌 홍자수 장군과 함께 전사하였다.
의병장 곽재우 이덕남 장군 제문에서 제갈량 비유
장군의 시신은 목촌면(현재 미양면 구수리 85번지)에 안장됐고,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제문을 지어 이덕남 장군의 지략과 충성심을 중국의 제갈량의 지략에 비유하며 추모했다.
이상은 <안성 향토사료집>의 이덕남 장군 소개다.
<안성 향토사료집>에 따르면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정규군 영웅이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영의정 유성룡이 임금 선조에게 추천할 만큼 큰 재목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규군이었던 이순신 장군과 달리 사정이 있어 고향에 돌아와 외삼촌(홍자수)과 외사촌(홍계남) 등과 처음 30여 명의 의병을 시작으로 서운면 청룡리에서 진천 넘어가는 고개인 엽돈령에서 왜적 10여 명을 사살한 후 3,000여 명의 의병으로 불어나 이후 왜적을 물리치다 전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10명 사살설은 이후 확인한 바에 따르면 김태영 선생의 <안성성기략>을 편역한 <안상정의 편역 안성기략>과 현재 홍계남 장군 고루비 안내 간판에는 7명 사살로 나온다.
이에 반해 <안성시지>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 임금에게 추천했다는 대목이 없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안성시 서운면 양촌리)에서 소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으로 달려가 임금을 호종하려 했으나 이미 선조는 의주로 몽진한 뒤였다.
그래서 다시 고향 안성으로 돌아와 외삼촌 홍자수, 외사촌 홍계남 형제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여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죽산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이덕남 장군의 의병활동 무대가 용인, 죽산, 양지 진 구축과 동시에 서운산성에 토성을 쌓아 경기와 호서(湖西. 충청도) 지방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러한 <안성시지>의 기록은 양반의 자제였고, 무과에 급제해 벼슬을 하다가 고향 안성으로 돌아왔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보위하려 한양으로 향했지만, 임금이 이미 의주로 떠나고 없어 다시 안성으로 내려와 관군이 아닌 의병을 모집해 외삼촌(홍자수)과 외사촌(홍계남)과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했다는 것이 <안성향토사료집>과 기록 내용과 달랐다.
두 기록이 같은 것은 처음 모집한 의병은 30여 명이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진천 넘어가는 엽돈령에서 왜구 10여 명을 사살한 후 인근에서 3,000여 명의 의병이 모였다는 것이다.
확인결과 여기서 10명 사살은 <안성향토사료집>(안성문화원. 2003년. 2003년 6월 26페이지)에 나와 있는 것이고, 김태영 선생의 <안성성기략>을 편역한 <안상정의 편역 안성기략>과 현재 홍계남 장군 고루비 안내 안내판에는 7명 사살로 나온다.
따라서 홍계남 장군 고루비 안내판과 김태영 선생의 <안성기략>을 선택한다.
안성시지 홍계남 장군 편에서는 “엽돈령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그가 비로소 대장기를 세움에 며칠 사이 그를 따르는 자가 3,000명이나 되었고, 마침내 목촌(미양면 구수리 진양사 인근 고개)에 보루를 쌓고 주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병과 진 치던 목촌면 고갯마루에 잠들다
그리고 <안성시지>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71년(숙종 44년) 그의 생가(서운면)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병조참의에 추증됐다.
현재 그의 묘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서운면 양촌리, 신기리, 미양면 양변리 인근 미양면 구수리 85번지로 당시 외삼촌 홍자수 장군과 외사촌 홍계남 장군과 진을 치던 당시 목촌면(미양면) 고갯마루(진재)에 있고 1975년 9월 5일 경기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됐다.
이덕남 장군의 묘비의 비문은 영조 때 학자 윤봉구가 지었고, 홍봉조가 글씨를 썼으며, 김진상이 글씨를 새겨 세웠다.
이덕남 장군은 살아서 의병과 왜구에 맞서 피땀 흘려 싸우고 진 치던 고갯마루 묻힌 것이다.
의병은 외적의 침임으로 국가가 민중과 공동체를 지켜주지 못할 때 자발적으로 조직해 대항하던 민중들이다.
그들은 정규군인 관군이 아니었지만, 지휘 체계가 있었고 의병장을 중심으로 뭉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위기의 국가와 지역공동체를 구하는 역할을 해냈다.
의령의 곽재우, 안성의 이덕남·홍자수·홍계남 의병 장군의 그들이다.
특히 이덕남 장군은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 생활도 했지만, 결국 고향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성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왜구를 무찔러 임진왜란을 막을 수 있었다.
특히,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지은 제문(祭文. 죽은 사람을 조상하는 글)에서 이덕남 장군을 중국의 제갈량의 지략에 비유했다는 것은, 같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이덕남 장군의 활약과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