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중학교에서 5월부터 9월까지 교사와 이주민 관련 지역 활동가 등 약 20명을 대상으로 매주 한 차례 기초 러시아어 교육이 진행됐다.
비룡중학교 교사와 지역 활동가들이 러시아어권 이주배경자녀와 소통하기 위해 직접 러시아어를 배웠다. 이주배경자녀에게 일방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적응하라고 요구하는 데서 벗어나 학교와 지역사회가 이들의 언어에 먼저 다가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번 교육은 교사와 활동가들의 자발적인 실천인 동시에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학교 현장의 언어 장벽과 제도적 과제를 드러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교육당국이 이중언어 교육과 소통을 담당할 교사와 보조인력을 확보하고, 이주배경자녀가 학교와 지역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학생의 언어에 먼저 다가선 교사와 활동가들
안성이주민을 위한 인권모임(대표 이학범)은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비룡중학교에서 교사와 이주민 관련 지역 활동가 등 약 20명을 대상으로 매주 한 차례 기초 러시아어 교육을 진행했다.
이번 교육은 ‘2026년 안성시시민활동통합지원단 마을공동체지원센터 동아리 지원사업’에 선정된 ‘이웃사촌 러시아어 학습 기반 이주민 소통 및 주민 네트워크 활동’의 하나로 마련됐다.
비룡중에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권 출신 이주배경자녀가 다수 재학하고 있다. 교사와 학생이 기본적인 의사조차 나누기 어려운 학교 현장의 현실이 이번 교육의 출발점이었다.
‘말문이 트이는 소통, 주민 주도 러시아어 초급 소통 교실’은 문법이나 시험을 위한 외국어교육보다 학교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생활 회화에 초점을 맞췄다. 인사와 안부 묻기, 칭찬하기, 간단한 수업 지시어 등 학생과 관계를 맺고 수업 참여를 돕는 표현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교사가 학생의 언어를 배우는 일은 단순한 외국어 학습을 넘어선다. 자신의 언어로 건네는 짧은 인사와 칭찬은 이주배경자녀에게 학교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가 될 수 있다. 교사에게도 학생의 반응과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통 통로가 생긴다.
황규덕 비룡중학교 국제이해부장은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중도입국 학생이 일반 교과 수업에 온종일 앉아 있는 것은 학생에게 큰 고통”이라며 “교사들이 인사말이나 칭찬, 간단한 수업 지시어 등 기초적인 러시아어라도 익힌다면 학생들이 수업에서 완전히 소외되는 것을 막고 최소한의 학습 동기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안성 학생 11명 가운데 1명은 이주배경자녀
이 같은 시도가 중요한 것은 안성의 학교가 이미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지닌 자녀들이 함께 배우고 생활하는 공간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안성시외국인주민지원센터(센터장 정인교)가 정리한 ‘2026년 안성시 학교별 다문화학생 현황’에 따르면 자료에 포함된 57개 학교의 전체 학생은 1만9,362명이다. 이 가운데 이주배경자녀는 1,731명으로 전체의 8.9%를 차지한다. 학생 11명 가운데 1명꼴이다.
센터 자료는 국제결혼가정의 국내 출생 자녀와 중도입국 자녀, 외국인가정 자녀를 합쳐 ‘다문화학생’으로 집계했다. 이 기사에서는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표현으로 ‘이주배경자녀’를 사용했다.
학교급별로 보면 초등학교는 전체 학생 9,010명 가운데 이주배경자녀가 1,053명으로 11.7%를 차지했다. 중학교는 5,365명 가운데 468명으로 8.7%, 고등학교는 4,912명 가운데 209명으로 4.3%였다. 그 밖의 학교에 1명이 재학하고 있다. 전체 이주배경자녀의 60.8%가 초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어 지원 수요가 저학년 단계부터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주배경자녀는 일부 학교에만 재학하는 것도 아니다. 자료에 포함된 57개교 가운데 55개교에 한 명 이상의 이주배경자녀가 있다. 이주배경자녀 비율이 10% 이상인 학교는 31곳, 20% 이상인 학교도 12곳으로 집계됐다. 이주배경자녀 교육이 특정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안성 교육 전반의 과제가 됐다는 의미다.
학교별 편차도 크다. 광덕초등학교는 전체 학생 234명 가운데 이주배경자녀가 215명으로 91.9%에 달했다. 내혜홀초등학교는 325명 가운데 89명으로 27.4%, 안성초등학교는 606명 가운데 136명으로 22.4%였다.
중학교에서는 비룡중학교의 이주배경자녀가 전체 636명 가운데 122명으로 가장 많았다. 비율은 19.2%다. 명륜여자중학교도 전체 431명 가운데 102명이 이주배경자녀로 23.7%를 차지했다.
이 같은 수치는 ‘다문화’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인 자녀들의 교육 여건이 학교와 개인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국내에서 태어나 성장한 자녀와 한국어를 거의 배우지 못한 채 입국한 자녀는 필요한 교육과 지원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개인의 헌신 넘어 이중언어 담당 인력 배치해야
따라서 학교별 학생 수뿐 아니라 입국 시기와 한국어 수준, 사용 언어, 교과 학습 정도 등을 반영한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 입국 초기 한국어교육과 교과학습 지원을 비롯해 학교 안내와 상담 내용을 학부모에게 정확히 전달할 통·번역, 정서와 또래 관계를 살피는 적응 프로그램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
특히 이주배경자녀가 많은 학교에는 주요 언어권별로 이중언어 교육과 소통을 담당할 교사와 보조인력을 안정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담임교사나 교과 담당 교사가 개인 시간과 비용을 들여 외국어를 배우거나 번역기에 의존하는 방식만으로는 지속적인 교육과 생활지도가 어렵다.
이중언어 담당 교사와 보조인력은 단순히 말을 통역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학생이 수업 내용을 이해하도록 돕고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의사소통을 중재하며, 학교생활과 진학 문제를 학부모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오해와 갈등을 줄이고 이주배경자녀가 학교 안에서 관계를 형성하도록 돕는 교육 인력이기도 하다.
안성교육지원청도 초등·특수교원을 대상으로 이주배경자녀 맞춤수업을 위한 AI·디지털 활용 연수를 진행하는 등 관련 대응을 확대하고 있다. 비룡중 러시아어 교육은 이러한 제도적 노력을 생활언어와 관계 형성, 학부모 소통의 영역까지 넓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현장 사례다.
함께 살아갈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공적 의무
이주배경자녀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학교 운영상의 필요에만 있지 않다. 국적과 출신지역,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구도 배움과 관계에서 배제돼서는 안 된다는 인간 존엄과 평등의 문제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을 동등한 공동체 구성원으로 대하는 것은 국적과 인종, 언어에 따른 편견과 차별을 줄이고 공존과 공생의 기반을 만드는 일이다.
이주민과 그 자녀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외부인이 아니다. 이미 지역 산업현장에서 일하고 세금을 내며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이웃과 생활하는 지역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앞으로도 이 지역에서 배우고 일하며 살아갈 사람들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이들에게 한국사회에 적응하라고 요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이미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고 있고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구성원이라는 인식 아래 교육과 행정, 복지 전반에서 이들의 권리와 필요를 살펴야 한다. 이주배경자녀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를 보장하는 것은 선택적인 배려나 시혜가 아니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이행해야 할 공적 의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이중언어 담당 교사와 보조인력의 배치 기준과 자격, 예산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와 교육당국은 학교별 이주배경자녀 수와 언어권, 한국어 수준을 파악해 필요한 인력과 교육 프로그램을 학교 현장에 배치해야 한다.
자녀 교육은 이주민 가정과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자녀가 학교에 안정적으로 적응하면 학부모도 담임교사와 다른 학부모, 지역 기관과 관계를 맺을 기회가 늘어난다. 반면 언어 장벽으로 학교와 가정의 소통이 끊기면 결석과 진학, 생활지도 같은 기본적인 문제조차 제때 공유하기 어려워지고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깊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주배경자녀 교육은 일부 자녀를 위한 복지사업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학생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교육정책인 동시에 이주민과 지역 주민 사이의 거리와 갈등을 줄이고 지역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정책으로 다뤄야 한다.
자발적 러시아어 교육, 제도화의 계기로
교사와 활동가들의 자발적인 러시아어 학습만으로 학교 현장의 언어 장벽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이번 동아리 지원사업의 성과를 일회성 활동에 머물게 하지 않으려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교육당국이 필요한 인력과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안성시와 안성교육지원청, 학교, 안성시외국인주민지원센터 등 관련 기관이 참여하는 상시 협력체계를 구축할 필요도 있다. 이를 토대로 한국어교육과 교과학습 지원, 통·번역, 학부모 상담, 교사 연수를 연결하고 이중언어 담당 교사와 보조인력의 배치 기준과 역할, 예산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학범 대표는 “마을 주민들이 함께 러시아어를 배우며 상생의 손을 내민 것처럼 이제는 안성시가 공적 영역에서 학생과 교사들의 손을 잡아줘야 한다”며 “이주민 자녀들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의 주변부로 겉돌면 결국 지역사회 전체의 아픔과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모임 관계자도 “교사들이 개인 시간과 사비를 들이고 번역기를 활용하면서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개인의 헌신에만 기대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지자체와 교육기관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비룡중 교사와 지역 활동가들이 시작한 러시아어 교육은 학생에게 한국사회에 적응하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학교와 지역사회도 이주배경자녀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번 러시아어 교육이 한 학교와 지역 활동가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그치지 않고, 이중언어 담당 교사와 보조인력 확보를 비롯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제도 마련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는 이주배경자녀만을 위한 지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지역공동체를 지키고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황형규 기자 mirhwang7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