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수 안성4.1독립항쟁 기념사업회 회장
[기고] 예전에는 6월이 그리 덥지 않아 여름으로 알기는 조금 이른 감이 있었으나 기후가 상승하고부터는 여름 못지않게 33도를 넘나드는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려 삼복더위 저리가라고 폭염경보를 내리곤 한다. 그 뜨거운 여름에 수확되는 농산물 중에 지금은 식량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아주 희박해진 보리가 있다. 6·25전쟁을 겪고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쌀은 농가에서 생산은 해도, 스스로 밥상에 오르기엔 어려운 아주 귀한 존재였고, 음력 3~4월 보릿고개 식량의 중요한 부분을 보리쌀이 충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 어려웠던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덜 익은 쌀보리를 베어다가 말려서 풋바심해서 먹은 기억이 팔질의 세대에는 생생할 것이다. 지금은 내가 사는 수도권에서는 보리 수확 때가 되어도 보리 보기가 쉽지 않다, 이제는 보리쌀이 절실한 식량이 아니라 몸 건강에 제공되는 귀한 건강식이 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식물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냄새가 있다.
보리에게도 나름의 독특한 냄새가 있고 그것이 특별히 대중에게 혐오를 주거나, 사랑을 받는 그러한 것은 아니고, 단지 6~70년대, 보리의 수확 과정에서 필자만의 특별한 체험 과정을 통한 고통이 보리 냄새에 묻어 기억되는 특별한 경우이기에 이 글을 쓴다.
대부분의 사람은 보리 냄새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관심 없으면 보리뿐 아니라 여타 식물도 굳이 냄새를 구분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보리가 익어가 수확이 가까운 여름, 보리밭 근처에만 가도 쉽사리 보리 냄새를 구분하여 그 고통스럽던 순간을 연상하게 된다. 그렇게도 6~70년대 보리 수확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특히 내겐, 왜냐하면 작업의 시종을 원시적인 인간의 수작업으로 그 뜨거운 여름철 뙤약볕 아래서 행해야 했기 때문이었고 숙달되지 못한 일꾼(?)이 숙달된 일꾼을 따라가자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보리는 익어가면서 그 특유의 냄새를 발산한다. 관계없는 사람은 전연 개의하지 않을 그런 냄새다. 그러나 다가올 보리타작을 앞둔 시원찮은 농부의 입장에서는 과히 기분 좋은 냄새일 수가 없다. 뙤약볕 아래의 작업 과정이 워낙 고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피할 길도 없었다.
우선 잘 자라 다 익은 보리를 베는 일부터 내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낫으로 일일이 베었는데 이미 수년을 농사에 종사하여 몸에 밴 일꾼(?)들은 기술과 요령이 몸에 배어 남들이 보기에 손쉽게 죽죽 베어 나가는데 초보 농사꾼, 도저히 일꾼 축에 끼지 못하는 나는 언제나 맨 뒤쪽에서 따라오지 못하고 헤매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봐준 탓인가, 핀잔은 따로 없었지만 자괴감에 몸 둘 바를 몰라 했고 잔뜩 마신 막걸리에 의존하여 안면몰수하고 때를 넘기곤 했다. 체면 구기는 것은 둘째 치고 품앗이란 같은 노동력끼리 1:1로 주고받는 것이 윈칙인데 거의 반도 못 따라오는 내게는 품앗이 판을 재고해야만 하는 기본적인 문제가 발로되지는 않고 잠재되어 있었으나 당시 품앗이하는 일꾼 중 가장 연소한 탓인지 아니면 가끔 함께하는 술판에 어떻게 거부당하지 않고 끼게 된 탓인지 수년을 그럭저럭 추수까지 함께 하는 품앗이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요즈음은 보리나 벼를 수확하는데 낫이 쓰이지 않는다, 기계가 그 작업을 대신해 준다.
벤 보리는 묶어서 단을 만들어가지고 지게를 이용하여 탈곡장(주로 집마당)까지 운반해야 하는데 여기에도 숙달이 문제가 된다. 몸에 밴 일꾼들은 지게에다 엄청난 양의 보리를 얹어 잔뜩 지고 바로 내달리는데, 초보 농사꾼은 지게에 얹는 것부터 서툴러 계속해서 보릿단을 떨어뜨린다 던가 괜신히 얹은 초라한 한 짐을 일어나지 못하고 쓸어뜨린다 던가 등으로 일이 지연되고 제 몫을 훨씬 못 미치게 작업하니 죽을 맛이다.
게다가 이런 어려운 일련의 작업이 한 여름 간단없이 쏟아지는 뙤약볕 아래서 이뤄지다 보니 보리까락이 땀에 쩔은 속살을 까끌까끌 찌른다든가,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 못하는 어려움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뿐인가? 다음에 이어지는 작업 순서는 어려움의 정점에 이르게 되는데, 소위 보릿단 태질이다. 태질이란 글자 그대로 단을 어깨너머로 내려쳐서 나락을 강제로 떨어버리는 일련의 원시 노동인데 요령도 물론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계속할 수 있는 지구력이 필요한데 약골인 내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도 룰이 있어서 보릿단을 돌려가며 털 수 있도록 새끼줄로 요령 있게 감아서 한쪽으로만 내리치면 감당할 수 없으므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려가며 내려쳐서 떨어야 했고 엄격히 순서가 있어서 땀난다거나 힘들다고 비켜설 시간이 전혀 주어지지 않아 그야말로 노동이 아니라 고역(苦役)의 연속이었다. 그뿐인가?
그런 고역의 연속으로 일단 태질은 끝났으나 마무리가 필요한데 바로 도리깨질이다, 태질로 털은 보리는 덜 떨어져서 보리 이삭이 그냥 있거나 알곡 상태가 불량하여 소위 몽글어야 했다. 떨은 보리를 모아놓고 도리깨로 힘껏 내려쳐 우량한 알곡이 되도록 하는 작업인데 오직 필요한 것은 센 근력으로서 약골은 감당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각자도생이 아니라 구령 맞춰가며 함께 내리치는데 거기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처지면 큰 낭패가 되니 이래저래 적자만 생존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세월을 지금 생각해 보니 용케도 살아남았다.
이런 어려운 인고의 세월을 산 탓인지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도 보리 냄새를 맡게 되면 그 생각에 몸이 쪼그라지는 것은 우매한 탓인가! 그리고 이때를 더욱 어렵게 했던 사실은 당시에는 가정에 목욕시설이 없어서 종일 흘림 땀과 몸에 잔뜩 붙은 까락 등을 닦아낼 장소는 천상 흐르는 냇물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상의 얘기는 수십 년 전의 한때 생활상으로서 이제는 지나간 역사의 아주 작은 시간 속에서 잊혀져 갈 관습이었지만, 당시의 내게는 삶의 전부였고, 생존방식이었다.
이제 우리는 부유를 누리고 있다.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자랑스러운 나라에서 여러 나라 국민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선진국 국민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보리 냄새의 처절함은 결코 나만의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치부(置簿)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역사학자의 의미심장한 말을 소개하면서 글을 끝낸다.
“오늘의 부유가 100년, 200년, 아니 그 이상 가도록 해야 한다”
김태수 안성4.1독립항쟁 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