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선언: 1923년 신채호가 쓴 강전식 지사가 소속한 의열단이 발표한 조선혁명 선언문이다. 강도 일본으로부터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출처: 독립기념관)
새로 발굴된 안성 출신 김필연 독립운동 유공자 관련 기록이다. (경기도청 제공)
경기도가 지난 2월 9일 숨은 독립유공자 1,094명을 새롭게 찾아냈고, 그중에 공적이 확인된 648명에 대해 2월 5일 국가 보훈부에 포상을 신청했다고 발표했다.
이번에 새롭게 찾아낸 안성 출신 독립유공자는 81건으로 개성 120건, 수원 95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유공자가 새롭게 발굴됐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 발굴된 대표적인 인물로 밀정을 처단한 안성 출신 의열단 강건식 지사를 소개했다.
경기도는 강건식 (안성 출신) 지사를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활동하며 밀정을 처단하고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이수했다. 일제가 요시찰인으로 등재해 감시했으나 끝내 잡히지 않았다”라고 밝히며 “체포되지 않은 성공적 활동가” 중 한 명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안성 출신 김필연 독립운동가를 “안성 만세 시위 중 체포되어 1년 넘게 이어진 잔혹한 고문과 열악한 수감 환경을 견디다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옥중에서 순국했다”라고 소개했다.
경기도는 숨은 독립유공자 발굴을 안중근 의사 유묵 확보, 광복 80주년 기념 독립운동가 80명 선정, 독립기념관 설치 추진 등 경기도가 추진 중인 독립운동 기념사업이 계속해서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경기도는 지난 2월 9일 최근 ‘경기도 독립운동 참여자 및 유공자 발굴 연구용역’을 마무리하고 이같이 조치했다고 밝혔다.
경기도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도내 독립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고, 숨은 애국지사를 발굴하기 위한 ‘경기도 독립운동 참여자 및 유공자 발굴 연구용역’을 지난해 5월부터 진행했다.
도는 지난해 12월 말까지 객관적 입증자료가 부족해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 참여자를 대상으로 ▲경기도 출신 독립운동 참여자 관련 문헌 조사 및 수집 ▲참여자 개인별 공적서 작성 및 서훈 신청 ▲참여자 발굴 관련 학술회의 개최 등을 통해 실질적인 조사와 발굴을 진행했다.
특히 “발굴된 1,094명을 연령대별로 분류하면 20대가 367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10대 소년들도 70명이나 포함되어 청년층의 저항 의지가 매우 높았음을 보여줬다. 직업군으론 농업 종사자가 232명으로 압도적이었으며, 학생(97명)과 상인(68명)이 그 뒤를 이었다”라며 “이는 독립운동이 지식인뿐만 아니라 민초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음을 의미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며 “활동 계열과 지역 측면에서는 3·1운동 참여자(391건)와 국내 항일 운동(339건)이 절반을 훌쩍 넘었으며 지역 분포로는 개성(120건), 수원(95건), 안성(81건), 고양(71건) 순으로 많아 경기도 전역이 항일 투쟁의 본산이었음을 보여줬다”라고 의미 더했다.
경기도가 상세한 내용을 아직 밝히지 않았지만, 경기도는 이를 경기도 전역이 항일 투쟁의 본산이었다는 해석이다.
무력 항쟁으로 2일간 해방구 만들었던 안성 3.1운동
안성 3.1운동은 곳곳에서 6,000여 명이 일제 저항했다
일제강점기 파고다 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그 연장선에서 4월 1일과 2일 무력을 동반한 격렬한 만세 시위로 안성시 원곡면과 양성면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운동의 목적인 2일간 해방을 이뤄냈던 곳이 안성이었다.
안성 3.1운동 기념이 안성의 만세운동을 약사로 정리한 바에 따르면 그 이전에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양성면 덕봉리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던 남진우와 양성면 동리 출신으로 선린상고 다니던 고원근이 학생시위를 주도했고 읍내에서도 상인들이 만세 시위를 통해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이 안성에서도 이어갔다.
이후 3월 28일 읍내면 동리, 3월 29일 읍내 장기리, 3월 30일 안성시장(安城市場), 3월 31일 읍내 군청과 경찰서, 면사무소 등에서 만세 시위를 펼쳤다.
그리고 4월 1일 <원곡면에서 최은식, 이유석 등이 주도하여 주민 1,000여 명이 면사무소 앞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고개를 넘어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양성면에서도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둘러싸고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원곡면 주민들과 합세하여 양성주재소를 방화하고, 우편소를 파괴하였으며, 일본인 상점과 대금업자의 집을 부수었다.
다시 원곡, 양성면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서류, 집기, 일장기를 불태웠으며, 다음날까지 이어진 시위로 이 지역을 이틀간 해방시켰다>
그리고 4월 2일 <원곡면 주민들은 오전에 평택의 경부선 철도를 부수고자 모의하였으나 일본군 수비대가 출병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시위대를 해산하고 피신하였다. 이죽면(죽산면)에서는 죽산공립보통학교 양재욱과 안재헌 등이 학생 50여 명과 함께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두현리 주민 수백명과 함께 죽산주재소와 면사무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밤에는 2,000여명의 군중이 죽산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일죽면에서는 주민 수백명이 면사무소와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또 <삼죽면에서 주민 300여 명이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만세운동 후의 피해와 관련해 <안성의 3·1운동은 일제의 통치기관에 대한 파괴와 방화 등 적극적인 시위 항쟁이었고, 3월 11일부터 4월 3일까지 약 6,000여 명 이상의 규모로 전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일제는 3월 31일부터 일본군을 투입하여 검거를 시작하였고, 살인·방화·고문·투옥 등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르며 약 800여명의 참여자들을 체포하고 276호의 가옥을 방화하였다. 그 결과 현장·옥중·부상 순국자가 26명이 발생하였고, 태형 41명, 177명이 투옥되어 최고 12년의 중죄 형량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인당 최고 409엔에 달하는 손해배상금을 부담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가혹한 보복으로 많은 재산상의 손해와 희생이 뒤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의병-동학-의병-안성3.1운동·의열단 등
안성 민중의 의(義)의 역사엔 무력투쟁 맥(脈) 있었다
이번에 경기도가 발굴한 안성 독립운동가 81건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으며 밀정 처단 등 일부를 활동 일부를 공개한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강건식 지사의 경우와 안성 만세 시위 중 체포되어 판결 전 옥중 순국한 김필연 독립운동가의 경우 안성 출신이라는 공통점뿐만 아니라 공동체 위기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희생하는 것이, 의(義)라고 믿고 실천한 안성 민중을 새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3.1운동의 경우 평화적 시위로 시작됐지만, 독립운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으로 강점한 일제를 무력투쟁으로 맞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2일간의 해장을 쟁취한 곳이 안성이었고, 그 중심은 농민을 주축으로 한 안성 민중이었다.
벼슬아치 등 관료가 아닌 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안성 민중의 역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의 무능함에 백척간두에 몰린 국가공동체를 지탱하고 구했던 서자(庶子) 출신 홍계남과 이덕남 의병장과 그를 따라 의병(義兵)의 주축이 된 농민 등 민중이 다시 조선왕조 말과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안성 민중의 의(義), 의병(義兵)의 역사가 있음도 알 수 있다.
다시 3.1운동 기념관 홈페이지에 정리된 일제강점기 ‘의열투쟁과 광복’을 살펴보면 안성 민중이 국가공동체 위기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일단의 맥을 짚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임시정부와 연계한 수많은 항일단체와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격렬한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독립운동의 방략이 모색되던 중 일제의 기관 시설 파괴와 밀정, 친일파 등의 처단을 목표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과 같은 의열투쟁이 전개되었다. 안성지역 출신 중에서도 이러한 의열투쟁에 참여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죽산면 장계리 출신인 김태원(金泰源, 1896년~1975년)은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충청도 특파원에 파견되어 국내로 잠입, 선전 활동과 군자금 모집, 철혈단(鐵血團)과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다 1920년 8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리고 금광면 개산리 출신인 유만수(柳萬秀, 1921~1975)는 1945년 5월 조문기(趙文紀)·강윤국(康潤國)과 함께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동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 열린 아시아민족분격대회의 대회장에 다이너마이트 2개를 설치하여 폭발시켰다.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에서 활약한 안성지역 출신 인물들이 있었다. 미양면 강덕리 출신인 심광식(沈光植, 1911년~1960)년은 1936년 2월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고, 민족혁명당 중앙당 군사부원이 되어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의원정 의원으로 피선되었고, 1944년 6월 내무부 경위대에서 근무하였으며, 1945년 6월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장으로 임명되어 광복군 참령(參領)으로 복무하였다. 그리고 미양면 용두리 출신인 홍종윤(洪鍾允, 1917년~?)은 1944년 3월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여 경리출납관으로 근무하였고, 고삼면 봉산리 출신인 박건배(朴建培, 1910년~?)는 1945년 5월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가 그것이다.
한편, 이번 독립유공자 발굴과 관련해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기리고 그분들의 이름을 되찾아드리는 것은 후손으로서 당연한 책무”라며 “발굴된 독립유공자분들이 합당한 예우를 받도록 국가보훈부는 물론 시군과 협력해 경기도 독립운동사를 바로 세우겠다”고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임진왜란 의병-동학혁명을 거쳐 다시 의병으로 안성3.1운동 무력투쟁으로, 그리고 의혈단 등 무장 독립투쟁에 의(義)로운 안성 민중 역사의 맥(脈)이 이어지고 있었다.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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