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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7-2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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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금, 홍계남 사후 “증직(贈職)을 다시 의논하게 했다”

그러나 기득권 양반 벼슬아치들은 더 이상 증직을 말렸다
홍계남 장군이 서얼 출신이라 기득권이 조직적 반발한 듯
안성 의병장 이덕남, 홍계남 의병장(義兵將)을 기억하자 ⑨

기사입력 2025-08-31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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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 5월 3일(1597년) 5번째 기사. 홍계남 장군 사후 증직 논의

역성혁명으로 들어선 조선 시대는 왕()을 정점으로 형성된 문·무 양반(兩班)이 독점하고 기득권인 지배계층을 유지하며 특혜를 누리고, 피지배계층인 대다수인 농민과 일부인 상공인인 상민(常民)과 노비, 무당, 백정 등 천민(賤民)의 지배 강화하며 국가를 유지하는 신분제 사회였다.

왕을 정점으로 크게는 양인(양반, 중인, 상민) 천인(천민) 즉 양천제(良賤制)에서 점차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신분 계급이 고착됐다.

신분 계급이 고착되며 왕 아래서 사실상 권력과 각종 특권을 독점했던 지배계층인 양반 계급의 독점성이 강화되며 서얼을 포함한 중인의 양반 진출은 물론 상민과 천민의 양반 계급 진출은 불가능한 구조로 고착됐다.

양반은 조선 초기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뜻하였으나 이후 가문(家門)까지 칭하는 임금 아래 권력 상층 지배계층 신분으로 굳어지며 신분이 대대로 물려받는 세습(世襲)으로 조세 면제, 군역 면제 등 다양한 특권을 누렸다.

왕은 물론 그 왕 아래에서 지배계층 특권을 독점한 일부 양반은 그들 양반을 위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신분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정된 관직을 독식하는 구조를 공고히 해 나갔다.

특히, 그들 기득권 양반의 자손이라도 정실부인에서 태어난 적자녀(嫡子女)와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녀(庶子女)의 차별 대우했고,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 등으로 과거시험(문과)을 치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가문의 후계자로 대를 이을 수 없도록 했다.

그 서얼과 같은 중인으로는 중앙과 지방에 있는 관청의 서리와 향리 및 역관, 기술관, 천문관 등의 직업군은 직역이 세습됐지만 역시 문과 시험 응시가 금지됐고, 무과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중인도 제도적, 현실적으로 신분의 벽을 허물고 양반이 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리고 피지배계층인 상민(평민)은 대부분 농민이고, 소수의 수공업자, 상인도 속한 직업군으로 실질적인 생산 등 경제활동을 담당했고, 군역, 조세 등 각종 의무까지 부담하며 국가 재정을 감당했지만, 지배계층으로 신분 이동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한 최하층인 천민은 노비, 백정, 무당, 광대 등으로 구성됐고, 특히 노비의 경우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각종 특권을 누리는 최상위 지배계층인 기득권 양반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한정된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 과열로, 서얼과 중인 그리고 상민(평민)의 진입 장벽을 제도적 정치적으로 신분제 사회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그들 국가와 양반 기득권층의 신분제가 제도적, 현실적으로 공고화되며 군역과 세금, 부역 등의 강제로 그들을 떠받쳐야 하는 하중이 높아졌고, 일부는 관료들의 수탈까지 이어지며 피폐(疲弊)한 피지배계층 등 하층 계층의 누적된 불만이 쌓여갔다.

국가인 조선이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과 최상위 지배계층인 양반을 위한 수탈 도구로 전락하며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신분에서 탈피해 상위 하층 지배계층과 상위 지배계층으로 진출해 신분으로 인한 각종 수탈과 불이익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간절했다.

<조선사회(朝鮮社會)를 일명 양반사회(兩班社會)라 칭한다. 그것은 왕()을 정점으로 문·(·) 양반(兩班)에 의하여 통치되어 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반이라 함은 지배계층(支配階層)을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朝鮮) 초기의 지배신분이라해서 후기까지 계속 집권층 대열에 참가할 수만은 없었던 것으로, 그것은 국초 이래 한정된 관직만으로는 증가하는 양반 인구를 전부 수용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정치·사회·경제적인 변동으로 신분상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서 과거에는 양반 신분이 아니었으나 새로운 양반층으로 상승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임진왜란은 피지배 계층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였다?


앞서 밝혔듯이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국가인 조선은 외적으로부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기는커녕 속수무책으로 추풍낙엽처럼 패했고, 선조 임금은 의주로 피난 가기에 급급했으며, 국가공동체와 구성원인 백성의 운명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이게 됐다.

그런 와중에 지역과 국가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과 의병장에 의해 버티고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국가인 조선과 왕을 정점으로 하는 최상위 지배계층인 양반이 한 일은 그들 의병과 의병장 일부의 전공(戰功)을 파악해 관직을 내리며 독려와 국가 정규군화 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일본군(日本軍)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하자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적을 맞아 싸울만한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국방을 담당하기 위해 국초(國初)에 편성된 오위제(五衛制)가 이미 붕괴되어 관군(官軍)이란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왜란 초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의병(義兵)이 봉기하여 무력한 관군을 대신하여 용감히 싸웠고, 후에 관군이 다시 정비되어 전투력을 갖추면서 차츰 의병 세력은 약화되었지만 관군이든 의병이든 간에 싸워 공을 세운 자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공을 세운 자에게 의당 취해져야 할 것이지만, 적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군공(軍功)을 세우지 못한 자에게도 공을 세우기만 하면 군공의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난국을 타개하는 데 공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에서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그러나 <군공수직(軍功受職)으로 하층 신분이 상층 신분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사회 여건으로 그 과정에 있어서도 군공을 빙자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면천(免賤면역(免役) 등의 특혜를 받으려 하였으며, 수직(受職)을 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편, 군공청(軍功廳)에서 군공을 가려내는 데 있어서도 공정을 기하기가 어려웠다. 군공은 많으나 상직(賞職)이 낮은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군공은 적으나 지나친 상직을 받는 자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군공이 전혀 없는 자에게까지 상직(賞職)이 주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신분제 사회로 소수의 양반 등 지배계층만이 기득권으로 특권을 누리는 사회에서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간절한 신분 상승의 기회가 생겼지만, 당시 조선왕조 관료사회의 부패로 오히려 부정부패의 또 다른 온상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의병으로의 활동이 군공(軍功)으로 인정받아도 벼슬은 한계가 있었고, 기존 기득권 양반 벼슬아치들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한 번 싸움에 패퇴하고도 판서 벼슬 추증(追贈)했었는데


선조실록88, 선조 3053(1597) 5번째 기사 홍계남의 전공에 따른 증직을 다시 의논하게 하다는 내용이 나온다.

<“홍계남(洪季男)에게 증직(贈職)하는 것이 옳은가의 여부를 비변사와 의논하여 아뢰라는 일이 판하(判下)되었기에, 비변사에 의논하였더니 홍계남이 전후에 세운 전공은 참으로 많으나 이미 당상관(堂上官)으로 특진되었으니 증직까지 하는 것은 조금 지나친 듯하다. 해조(該曹)에서 별도로 부의(賻儀)를 내리도록 하고, 또 상사(喪事)를 주관하여 고향에서 장례하게 하며, 그의 노모에게는 음식물을 제급(題給)하고 처자에게는 3년 동안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다만 의병이라 일컫고 단 한 번의 싸움에 패퇴하여 그 사졸을 몽땅 잃은 자에게도 재질(宰秩. 판서 벼슬과 녹봉)을 추증하였는데, 계남으로 말하면 흉적들이 가득히 있을 때에 우뚝이 충청우도(忠淸右道)의 보루(堡壘)가 되어 반쪽의 하늘을 떠받쳤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로인가. 옛사람들은 전사한 장수들에게 대부분 그 직질(職秩 벼슬과 녹봉)을 추증하였으니, 짐의 뜻은 증직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임진년의 왜란에 원훈(元勳)과 노련한 장수들도 혹 오랑캐에게 항복하기에 바빴으나 계남은 본시 미천한 사람으로 떨치고 일어나 몸을 돌보지 않고 우뚝이 호우(湖右. 충청도지방) 의 한쪽 보루가 되었다. 그가 분노를 느껴 과감히 떨치고 일어난 용맹과 적개심에 불타 왜적을 막은 공로가 어찌 저 한 몸만을 온전히 하고 처자식을 보전시킨 신하들과 같은 차원에서 운위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비변사에서는 도리어 증직하라는 명령을 부당하다고 하였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장병들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홍계남이 159734세에 죽자, 선조가 사후 벼슬의 품계를 올려 주는 증직을 논의하라는 명을 했고, 이에 대한 비변사 논의 결과 보고에서 기득권 양반 벼슬아치들은 이미 당상관으로 특진하였으니, 추가로 증진은 지나치다고 견졔했고, 선조가 한번 싸움에 패퇴하고 그 사졸을 전부 잃은 자도 판서 등으로 추증했었다며 다시 논의해 시행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서얼 출신 홍계남에 대한 기득권 양반 벼슬아치들의 견제가 있었음에도 선조가 나서 홍계남 장군의 증직을 명하고 신하들이 논해 보고할 만큼이었으니 의병장 홍계남 장군의 당시 조선에서의 위상이 높았지만, 서얼의 한계도 드러난 것이다.

또한, 이는 당시 조정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수 없을 만큼 관료사회가 부패했다는 것이고, 국가 구실을 제대로 못 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이 일어나자 겨우 백성들에게 사실상 전공을 세우면 신분의 벽을 허물 수 있다는 기회를 주며 희생을 강요했던 것이고, 그 희생마저도 관료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 호에서는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을 살펴보고 그중 이몽학의 난과 관련해 홍계남 장군의 연루설을 정리해 볼 예정이다.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

 

자치안성신문 (news6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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