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6-07-26 07:05

  • 기획취재 > 기획

조선 시대 서자(庶子) 차별 결국 못 없앴다.. 홍계남, 영조 이어 고종 때도 서얼(庶孼) 차별 논의 등장

안성 의병장 이덕남, 홍계남 의병장(義兵將)을 기억하자 ⑦
임금이 직접 어머니와 가족을 챙길 만큼 홍계남 장군 위상이 높았다

기사입력 2025-08-15 19:08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고종실록 11권, 고종 11년 2월 15일 무자 1번째 기사. 서자 차별 논의에 홍계남이 예로 등장한다.

안성 의병장 홍계남, 이덕남 장군과 관련한 연재를 이어가며 서자(庶子)였던 홍계남 장군과 관련 조선 시대 신분제를 엿보고 있다.

그러던 중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중 홍계남 장군을 검색해 보니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 서자(庶子)에 대한 왕과 신하 사이에 논의가 있었고, 지난 1265호에서 영조 때 홍계남 장군의 등장함을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선 시대 말인 고종 때도 서자(庶子) 차별 철폐 상소가 있었다. (고종실록 11권 고종 11215일 자 기사. 1874)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조선 시대를 관통하는 서자에 대한 신분 차별이 있었음이 선조실록을 통해 새삼 확인된 것이다.

<전 지평 홍찬섭 등이 서자에게 벼슬길을 열어 줄 것을 청하다>라는 제목의 실록 상소에는 조선 시대 서자 차별의 연원(淵源)과 함께 조선 시대 서자 차별에 주장과 논의했던 왕과 신하가 제법 있었고, 역시 차별 철폐의 이유로 홍계남 등 서자 출신이 차별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연재를 시작하며 언급했던 홍계남 장군과 홍길동전과의 관계를 살펴보기도 했던 터라 손을 떼 수 없어 고종실록에 나오는 상소와 사실상 무능했던 조선왕조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에 의해 국난을 극복하고 홍계남 장군 사후 임금이 직접 모친(母親)을 보살폈던 내용을 살펴본다.

조선 시대 말인 1874년 에게 올라온 <전 지평 홍찬섭 등이 서자에게 벼슬길을 열어 줄 것을 청하다>라는 상소에 따르면 조선 시대 초기 서자(庶子)에 대한 구별이 없었지만, 특정 관료 개인이 사적 감정으로, 경국대전 편찬 후 주해를 작성한 관료가 임의로 자자손손 서자가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게 말을 첨가해서 그렇다는 얘기가 나온다.


조선 시대 서자 차별은 개인 관료 영향 커


고종실록 11, 고종 11215일 무자 1번째 기사 속 상소에 따르면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이 처음으로 왕조를 세우고 각종 제도와 법을 만들었는데 또한 서자(庶子)에 대한 구별이 없었습니다라며 태종(太宗) 13년에 이르러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 언제인가 정도전(鄭道傳)의 남자 종에게 모욕을 당하고서 그 원한을 보복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바로 사비(私婢)였습니다. 정도전이 죄를 지어 죽자 품었던 감정을 풀기 위하여 서자는 좋은 벼슬에 등용할 수 없다는 의논을 제창하였으나 전부 벼슬길을 막지는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조선 초기 서자에 대한 차별이 없었고,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도 어머니가 노비였고, 살아생전 정도전의 노비에게 모욕을 당한 사람이 정도전 사후 서자의 벼슬길을 막았지만 전부 막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소에서는 성종(成宗) 때에 와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반포할 때에도 서자의 자손은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증손자는 역시 벼슬길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경국대전에 대한 주해(註解)를 달 때 강희맹(姜希孟)자자손손이라는 말을 첨가하여 이때부터 영원히 벼슬길이 막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사한 사람이 유감을 품고 사사로움을 부린 계책이 나와 나라의 법전(法典)에 실려 훌륭한 시대의 못 쓸 물건이 되어 의지할 곳이 없는 무리처럼 될 줄 누가 생각인들 했겠습니까?”라는 대목이 나온다.

경국대전에는 서자의 자손 중 증손자부터는 벼슬길을 막지 않았으나 이를 주해한 관료 강희맹이 자자손손이라는 말을 첨가해 서자는 영원히 벼슬길이 막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 현종, 영조, 정조, 순종, 현종, 철종 때의 사례를 들며 조광조가 서자를 발탁하여 등용할 의논을 내놓았지만, 남곤과 심정에게 저지당했던 사례, (율곡) 이이가 계속하여 서자들을 소통시키는 논의를 제창하였다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저지당한 사례, 송시열도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상소하기를, ‘서자들의 벼슬길을 막은 것은 원래 조종(朝宗)들이 정한 제도가 아닙니다. 왕조를 세운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의 어머니는 사실 시비였으나 그는 대제학(大提學)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인재가 드물어 늘 부족한 것을 근심하는 판에 저 서자들 가운데 쓸만한 사람을 버리고 있으니 아깝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던 사례 등을 열거했다.

그리고 서자이지만 걸출했던 인물을 열거했고, 그중 무관 중에 임진왜란 때 이산겸(李山謙), 홍계남(洪季男), 유극량(劉克良) 같은 사람들인데 의군(義軍)을 규합하여 왜병(倭兵)을 팔도(八道)에서 패망하게 만들었다며 의병 활동을 했던 홍계남 등을 예를 들며 서자 차별을 고종에게 서자 차별 혁파해달라고 상소했다.

조선 시대 서자 차별은 고종 때까지 왕과 신하들이 논의하기도 했지만,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며 임진왜란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서자 홍계남 장군을 거명하며 서자에 대한 차별을 왕에게 건의했다는 것은 선조 이후 서자 홍계남 장군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임진왜란이 1592년 발생했고, 상소가 조선 시대 말인 1894년에 있었으니 302년이 지나고 조선 시대가 끝나는 시기까지 서자 홍계남 장군에 대해 조선의 민중과 임금 그리고 신하들이 기억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임금 선조 홍계남 장군 가족 살아서도 사후에도 챙겼다


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 5월 6일 병신 6번째 기사, 임금인 선조가 비변사에 홍계남 사후 어머니에 대한 논의를 비변사에 지시하고, 보고 받는 내용이 나온다.

앞서 얘기했듯이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조선의 정규군인 관군(官軍)은 왜적(倭敵)에게 사실상 제구실을 못 했고, 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가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국가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생존이 위태로워지자,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민중(民衆)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 의병(義兵)이었다.

그렇게 의병(義兵)과 의병장(義兵將)에게 국가의 운명이 지탱되자 국가인 조선과 당시 임금인 선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중 일부인 의병장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이었다.

특히 서자(庶子)로 의병장이었던 홍계남 장군의 경우 살아서도 죽어서도 국가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을 가족에 대한 대우에서도 알 수 있는 기록이 선조실록에 남아 있다.

선조실록 47, 선조 27128일 정미 1번째 기사(1594)홍계남과 고언백의 처자에게 식량을 지급하도록 하다는 기사가 나온다.

내용은 들리는 바로는 홍계남(洪季男)의 어미와 적모(嫡母처자(妻子)가 모두 경기의 안성(安城)에 있다고 하니 식물(食物)을 계속 제급(題給)하고 가호(家戶)의 잡역(雜役)도 아울러 모두 면제하여 보호하도록 하라. 그리고 전일 고언백(高彦伯)의 처자에게도 식물을 계속 제급하라고 하서하였는데 그렇게 제급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을 잘 봉행하지 않는 수령은 치죄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안성에 사는 어미(홍자수의 첩. 홍계남의 어머니)와 적모(嫡母. 아버지 홍자수 장군 정실부인)과 홍계남 장군의 처자(妻子)에 대해 임금이 보호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린 것이다.

그리고 선조실록 88, 선조 3056일 병신 6번째 기사(1597) <홍계남의 어미에게 매달 요미(料米)를 지급하게 하다>에서는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제 그 한 몸이 나라를 위해 적군을 토벌하다가 불행히 죽었으니, 그의 어미가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달마다 단료(單料)를 지급해 주어 일생을 마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비변사에서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일을 전교하셨습니다. 전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시니, 아랫사람들의 마음이야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상교에 따라 홍계남의 어미에게 그가 죽을 때까지 요미를 지급하는 것이 의당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군사·인사·재정·외교 등 국정 전반을 처리하는 당시 조선왕조 최고 기구였던 비변사가 홍계남 장군이 사망하자 임금인 선조가 그의 어미의 일을 의논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그에 따른 의논 결과 죽을 때까지 요미를 지급하는 것이라 보고하니 결재했다는 것이다.

34세 사망한 홍계남 장군뿐 아니라 그의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해 홍계남 사후에도 임금이 직접 당시 조선왕조 최고 기구인 비변사에서 논의할 정도로 서자지만 의병장이었던 홍계남 장군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다음 호 계속)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

 

자치안성신문 (news660@naver.com)

  • 등록된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댓글0

스팸방지코드
0/500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