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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庶子) 홍계남에게 내린 벼슬은 의병(義兵)이 아니면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성 의병장 이덕남, 홍계남 의병장(義兵將)을 기억하자 ⑤
왕은 피난가고, 관료는 당파싸움 … 국난 극복은 의병뿐이었던 임진왜란

기사입력 2025-07-13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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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홍계남, 이덕남 장군 동상.

홍계남 장군 동상. 홍계남 장군 고루비와 이덕남 장군 묘가 있고, 임진왜란 당시 목촌(미양면 구수리)과 서운면 신기리, 양촌리(서양촌), 미양면 양변리 경계 고갯마루를 서운면사무소 방향으로 넘어가면 바로 나오는 연하저수지 앞에 이덕남 장군 동상과 함께 있다.

지난 호(1263)에서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에서 언급된 홍계남 장군에 대해 살펴봤다.

양반인 의병장 홍자수 장군의 아들이지만, 서자(庶子)로 태어나 사실상 벼슬이 불가능해 금군(禁軍)의 병사로 들어가 군관(하급 장교)가 됐던 홍계남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의병이 되어 전과(戰果)를 올리자 선조 임금은 그에게 벼슬을 내릴 수밖에 없던 점이 그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조선의 정규군인 관군(官軍)은 왜적(倭敵)에게 사실상 제구실을 못 했고, 임금이 의주로 피란을 가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국가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생존이 위태로워지자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민중(民衆)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 의병(義兵)이다.

정규군인 관군이 아닌 의병의 활동으로 사실상 조선의 운명이 지탱되자 의주로 피난 간 선조 임금이 할 수 있는 것은, 의병 활동의 독려(督勵)와 의병의 기병(起兵) 명령과 그들 의병 중 의병을 정규군에 편입시키는 일뿐이었다.

당시 국가인 조선의 정규군인 관군이 기강과 전략 그리고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정예화된 일본군에 밀려 파죽지세로 궤멸(潰滅)된 데는 1590(선조 23)년 통신사를 일본에 보냈음에도 무력한 왕실과 지배계층인 양반사회의 분열과 당파싸움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홍계남 장군이 군관(軍官)으로 따라갔던 그 통신사의 사신(使臣) 중 서인(西人)이었던 정사(正使) 황윤길이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변란(임진왜란) 가능성을 보고했지만, 동인(東人)이었던 부사(副使) 김성일은 ()은 그러한 실정과 형상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을 동요시키니 일의 마땅함에 매우 어긋납니다라며 변란의 가능성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를 했다.

그리고 선조가 묻기를,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황윤길이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김성일은 아뢰기를, “그의 눈은 쥐와 같아서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황윤길은 서인(西人)이고, 김성일은 동인(東人)이었기 때문에 조정 신하들은 각각 자신의 붕당(朋黨) 인사를 비호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다.

결국 임금인 선조가 김성일이 사신(使臣)의 임무 를 잘 수행하였다고 하면서 그의 직위[官資]를 올려 주고 황윤길은 축출하였으며, 점점 변경(邊境)의 방비(防備)를 소홀히 하였다는 것이 국사 교과서에 한 대목이다.

임금은 국가공동체의 존망(存亡)과 그 구성원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에 대해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임금 밑에서 권세(權勢)를 잡고 있던 양반인 조정 신하들은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싸웠고, 그 결과 동인(東人) 세력이 승리?해 통신사의 사신 중 대표 격인 황윤길의 판단이 아닌 부대표 격인 김성일의 판단을 임금인 선조가 수용하며 1년 뒤 임진왜란을 맞게 됐다.


왕인 임금은 의병 활동 확인과 의병 봉기 명령뿐
지켜야 할 백성인 민중에게 왕조 지켜달라 몰염치


그렇게 미리 왜란을 대비할 수 있었음에도 당리당략에 따른 당파싸움과 임금의 오판으로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인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수 없었던 조선은 왜군의 침략에 정규군인 관군은 속수무책으로 일방적으로 밀려 궤멸을 거듭했고, 결국 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가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앞서 언급했지만 정규군인 관군(官軍)으로 감당이 안 됐고, 아니 감당될 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스스로 자신들이 사는 지역과 그 구성원들을 지켜내기 위해 의병이 일어났고, 그 의병이 후방의 왜적을 무찌르며 백척간두(百尺竿頭)였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다.

물론 조선왕조의 임금인 선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의병의 전과(戰果)가 전쟁의 변수로 등장하자 백성들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명령하는 것 뿐이었다.

형식은 명령이었지만, 사실상 민중에게 왕조를 지켜달란 호소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얘기다.

이는 정규군으로 왜군을 막지 못하자 의병이 스스로 일어나 지역공동체와 그 구성원인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기 위해 외적과 싸워 전과(戰果)를 내자, 지켰어야 할 백성에게 스스로 싸워내 왕권을 유지해 달라는 무책하고 몰염치한 처사였고, 왕조시대였기에 가능했다.

훈련도, 군량미도, 급료도 없이 정규군이 패하고 올라간 후방에서 스스로 일어나 왕조 유지를 위해 나서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군사제도는 15세기 오위(五衛)라고 있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오위(五衛)는 농민을 징집하고 대신 베를 세금으로 내면 그 베를 팔아 급료 등을 군영의 일반 경상비로 충당하는 제도가 있었지만, 군포 수입이 지휘관의 욕심을 채우는 데 사용되며 군사적 공백에 임진왜란을 맞은 것이다.

정규군이라고 있었지만, 그 군대의 군사를 훈련 시키고, 급료 등에 써야 할 비용이 관료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흘러 들어가며 제대로 된 훈련도 없었고, 급료도 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일본의 정예의 군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사책 어디를 봐도 의병에게 무기와 식량 그리고 급료를 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실제 홍자수, 이덕남 의병장과 함께 홍계남 장군이 의병을 일으키며 나무를 베어 깃대 삼고, 기물을 녹여 병기를 만들고, 인근에 격문을 붙여 의려(義旅. 의병 義兵)를 불러 모았다라고 <편역 안성기략>, “의병을 모집하여 농기구를 녹여 (무기를) 만들어 군사를 조련시켜 북진하는 왜적을 여러 차례 걸쳐 격퇴시켰다라고 <안성시지>에 기록되어있다.

결국 정규군이 아닌 민중 스스로 일어난 의병이 ,스스로 농기구 등을 녹여 무기를 만들고,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며 한 의병 활동만도 못했던 것이 당시 정규군이었고, 조선의 임금과 관료였던 셈이다.

정규군인 관군의 연속된 궤멸(潰滅)로 피난까지 간 선조 임금과 조정이 기존 정규군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던 당시 상황에서, 적에게 빼앗긴 후방의 민중이 스스로 만든 의병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왕권은 임금에게 있으니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싸우라는 말(명령)밖에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의병에 의지 지탱되던 왕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일부 전과(戰果)과 일부 의병장 등에게 벼슬을 내리며 제도권인 왕조의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홍계남 장군은 일본 통신사 군관으로 다녀온 1년 뒤인 1592(선조 25) 28세에 임진왜란을 맞아 금군 소속으로 있다가 왕의 특명을 받고 파견되던 순변사 이일 휘하로 상주에서 패하고, 다시 이일과 함께 신립 휘하에서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에 패해 다시 임금이 있던 한양으로 갔지만, 이미 선조 임금이 선조로 몽진해 합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향 안성에 내려와 부친 홍자수 장군, 고종사촌 이덕남 장군과 앞서 얘기했던 엽돈령()에서 의병 30명과 첫 승리 후 3,000명의 의병을 모아 목촌(지금의 미양면 구수리) 고갯마루에 진을 치며 인근에서 왜군을 무찌르며 의병 활동을 하며 전과(戰果)을 쌓아갔다.

그러던 중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선조 임금이 당시 28세였던 홍계남 장군을 직접 수원 판관(判官. 5)에 이어 절충장군(무신 정3품 당상관)에 제수(除授)했다. 의병장 아닌 정규군 관료에 편입되며 서자(庶子) 출신으로 신분의 벽을 완전히 깬 것이다.

대부분 벼슬을 하지 않고 있던 지방의 문인 등 명망자(名望者)들의 부르짖음에 인근 지역의 농민(農民)은 물론 천인(賤人) 그리고 피난 중이던 기층 민중이 호응하며 조직화 돼 지역공동체는 물론 나아가 국가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낸 것이 의병 활동이었다.

그중에 의병장을 했던 홍계남 장군은 임란(壬亂) 당시 28세로, 양반이었던 홍자수 장군의 서자(庶子)로 명망가가 아닌 신분상 사실상 관료가 될 수 없었던 신분이었음에도 의병 활동으로 신분의 벽을 깰 수 있었다.

이는 의병장이었던 아버지 홍자수 장군과 같은 의병장인 고종사촌 이덕남 장군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목촌(미양면 구수리) 고갯마루에서 진을 치고 싸우다 죽산에서 홍자수 장군과 이덕남 장군이 왜군의 습격을 받고 전사하자 홀로 의병을 이끌며 세운 전과(戰果)를 조정에서 외면하지 못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종래의 양반 중심의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 임진왜란을 맞아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의병에 의해 국가공동체인 조선이 지탱되고 난국을 타개할 수밖에 없자 불가피하게 기득권에서 밀려났거나 기득권 밖에 있었던 사람을 제도권을 편입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그중에 엄격한 양반사회에서 서자(庶子) 홍계남 장군이 수원 판관(判官), 조방장(助防將) 이어 군수(郡守) 등의 보직을 받고 당상관(堂上官. 무관 정3)에 오른 것은 아주 특별한 사례였다.

양반이 아니면 높은 관직을 받을 수 없었는데, 서얼(庶孼)은 물론 노비와 백정까지 군공(軍功)만 세우면 일정한 품직(品職)을 임금인 선조가 내릴 수밖에 없었으니 당시로는 일대 큰 변화였다.

그만큼 국가와 정규군이나 관료들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에서 제구실할 수 없었다는 것이고, 신분제에 가려 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기층 민중이 사실상 국가공동체를 지켜내며 기득권의 정점인 임금과 그 아래에서 권세를 차지했던 양반 관료가 막아놨던 신분제를 깰 수밖에 없도록 강제한 셈이다.

의병장(義兵將) 홍계남 장군을 살펴보다가 신분제 사회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나 민중과 함께 국가와 지역공동체와 그 구성원을 지켜내며 신분의 벽을 깬 벼슬인 수원 판관(判官)을 선조 임금으로부터 받은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봤다.

벼슬 받기 전 의병 활동 중 미진했던 부분과 이후 벼슬을 받고 난 이후 활동에 대해 다음 호부터 이어갈 예정이다.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

 

자치안성신문 (news6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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