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맞춤랜드에 있는 안성의 빛낸 인물 홍계남 장군 흉상. 2011년 12월 안성문화원이 세웠다.
본지(자치안성신문) 1262호에서 의병장 홍계남 장군 사후 148년(영조 21년)인 1745년에 안성 민중에 의해 세워진 <홍계남장군고루비(洪季男將軍古壘碑)>에 대해 살펴봤다.
<안성시지(2011년 11월)>와 <안성 향토사료집(안성문화원. 2003년 6월)>, <홍계남 장군 고루비 안내판>, <안상정의 편역 안성기략(2008년)> 그리고 지난 호부터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의 기록을 참고해 의병장 이덕남, 홍계남 장군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의병장 홍계남 장군은 홍자수 장군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사실상 불가능했던 조선 시대 의병장 활동으로 신분의 벽을 뚫어낸 인물이다.
홍계남 장군에 대해 지금까지를 요약하면 1564년(명종 19)에 태어나 1597년(선조 30)에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홍계남 장군은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서자(庶子)로 처음에는 한양에서 임금을 지키는 금군(禁軍)의 병사로 출발해, 1590년(선조 23) 금군으로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의 군관(軍官. 하급 장교) 발탁됐다.
금군이 된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군관이 된 것이 1590년이라고 보면 그의 나이 26세이다.
그리고 2년 후 28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금군 소속으로 있다가 왕의 특명을 받고 파견되던 순변사 이일 휘하로 상주에서 패하고, 다시 이일과 함께 신립 휘하에서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에 패했다.
그리고 다시 임금이 있던 한양으로 갔지만, 이미 선조 임금이 선조로 몽진해 합류할 수 없어 고향 안성에 내려와 부친 홍자수 장군, 고종사촌인 이덕남 장군과 앞서 얘기했던 엽돈령(재)에서 의병 30명과 첫 승리 후 3,000명의 의병을 모아 목촌(지금의 미양면 구수리) 고갯마루에 진을 치며 인근에서 왜군을 무찌르며 의병 활동을 하며 공(功)을 쌓아갔다.
그러던 중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선조 임금이 당시 28세였던 홍계남 장군을 직접 수원 판관(判官. 종5품)에 제수했다.
판관(判官)은 조선 시대 소속 관아의 행정실무를 지휘, 담당하거나, 지방관을 도와 행정·군정에 참여했던 하급 관료였다.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선조실록에는 홍계남 장군과 관련해 총 44번을 거론하고 있었다.
그중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6일 계축 1번째 기사>에는 <… 거의(擧義)한 자가 없는가?" 하니, 신점이 아뢰기를, "안성(安城)의 의병 홍계남(洪季男)의 일을 배지인(陪持人)이 장하게 말하였습니다. 그 군사는 100명에 불과한데 왜적을 제법 많이 죽였다고 합니다." 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거의(擧義)는 의(義)을 일으키다(擧) 즉 의병을 일으킨 것을 이르고, “거의를 한 자는” 의병을 일으킨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풍전등화속 조선의 임금인 선조가 안성에서 홍계남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으로 크게 무찌르고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다는 것이다.
정규군이 침략한 왜적을 막아 국가공동체와 그 구성원을 지킨 것이 아니라 속수무책을 거듭하며 패퇴(敗退)해 의주로 피난간 임금이 정규군이 아닌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 왜적에 맞서 싸우는 의병에 의지하며 사실상 보고(報告)만,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임금인 선조가 “거의(擧義)한 자가 없는가?"라고 물었던 것은, 그러한 의병의 활약이 있어야만 국가인 조선이 지탱될 수 있었고, 그들 의병의 거의(擧義)에 의지해야 할 만큼 조선군 최고 통수권자인 임금과 정규군이 나약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국가에서 군을 두고 일정한 훈련 과정을 거쳐 외부의 적으로부터 영토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정규군이 제구실을 못 하고 사실상 패하기만 해 민중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낫, 곡괭이, 죽창, 돌을 들고 싸웠던 의병만 못했음을 새삼 확인하는 대목 중 하나다.
<안성시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홍계남, 이덕남, 홍자수 장군이 “의병을 모집하여 농기구를 녹여 만들어 군사를 조련시켜 북진하는 왜적을 여러 차례에 걸쳐 격퇴시켰다”는 대목이다.
당시 의병은 제대로 군사 훈련도 받지 못했고 싸울 무기도 없었다는 것이다.
정규군이 아닌 민중이었던 의병을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의병장이 중심이 되어 스스로 훈련 했고, 스스로 없었던 무기를 민중의 생활 수단이자 도구인 농기구를 녹여서 무기를 만들어, 임금과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을 대신해 한반도 국가공동체인 당시 조선(朝鮮)을 지켜낸 것이다.
그렇게 국가인 조선과 그 왕조시대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가 왜적에 패퇴해 멀리 도망갔지만, 그들 민중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의병(義兵)이, 서운면과 미양면 등 안성에서 홍계남, 이덕남, 홍자수 의병장(義兵將)을 중심으로 털치고 일어난 의병(義兵)이 스스로 국가공동체인 조선을 지탱하고 왜란을 극복해 낸 것이다.
따라서 그 영향력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 중 일부를 국가공동체에 정규군(正規軍) 내 보직(補職) 또는 관직(官職)으로 편입(編入)을 사실상 강제당해 벼슬을 내리는 과정에서 홍계남 장군이 수원 판관(判官)이 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30권, 선조 25년 9월 11일 무진 1번째 기사>에는 <홍계남을 수원 판관에 제수하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덧붙여 <홍계남(洪季男)을 수원 판관(水原判官)에 제수하였다. 계남은 경성(京城) 사람이고 그의 어머니는 창기였다. 이때 안성(安城)에서 군사를 모아 왜적을 막아 싸웠는데 용맹이 군중에서 제일 뛰어났고 왜적도 많이 살해하여 적들이 그라고 하면 꺼렸다. 그리하여 호서(湖西)가 그를 힘입어 보전되었다.>
그러나 홍계남을 안성(安城)이 아닌 경성(京城. 서울 옛 이름)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서운면 양촌리에서 태어난 홍계남 장군이 경성(京城)에서 왕을 지키는 금군(禁軍)의 병사로 있다가 1590년 일본 통신사의 일행의 군관(軍官. 하급 장교)으로 발탁되며 살았기 때문인지 안성(安城)이 아닌 경성(京城)사람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홍자수 장군의 서자(庶子)였던 홍계남 장군의 어머니가 창기(娼妓. 기생)라고 표현하고 있어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朝鮮)에서의 지위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인 선조는 그러한 홍계남 장군에게 직접 수원 판관(종5품)의 벼슬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의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국가인 조선의 임금이 홍계남 장군과 의병의 존재를, 그들의 희생과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안성맞춤랜드 안성을 빛낸 인물 홍계남, 공안국, 이유석, 김태영 흉상. 좌측 첫 번째가 홍계남 장군이다.
그리고 <선조실록 30권, 선조 25년 9월 13일 경오 1번째 기사>에는 <비변사가 홍계남을 물력이 풍부한 수원 판관에 제수하라고 청하다>라는 대목과 함께 <경성의 울타리가 되어 왔으며, 적도들이 여러 차례 들어갔었으나 물력(物力)은 감소되지 않았습니다. 모름지기 용맹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지키게 하고 양주 목사 고언백과 기각의 형세를 이루게 한다면 회복의 공을 책임지울 수 있을 것입니다. 홍계남(洪季男)은 적을 만날 때마다 사살하여 명성이 크게 떨쳤으니 계남을 판관(判官)에 제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고 덧붙이고 있다.
앞서 실록 9월 11일 자 수원 판관에 제수한다는 내용과 시간상 상충(相沖)되지만, 9월 13일 비변사가 홍계남의 수원 판관 제수를 청했고, 이유를 경성(京城)의 울타리가 되어왔다는 점, 적을 만날 때마다 사살하여 명성이 있는 사람이니 판관으로 제수해 달라고 하니 임금(상)이 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선조실록 30권, 선조 25년 9월 29일 병술 2번째 기사>에서 <이항복·홍성민·유영길·이해수·홍계남·한명윤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라는 대목과 함께 <이항복(李恒福)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에, 홍성민(洪聖民)과 유영길(柳永吉)을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에, 이해수(李海壽)를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에 제수하였고, 홍계남(洪季男)을 통정대부로, 한명윤(韓明胤)을 통정대부로 올렸다.>고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 홍계남 장군 관련 기록 44번 중 수원 판관 제수와 관련한 기록은 위와 같이 3번 임진년(0592년. 선조 25) 9월 11일, 9월 13일, 9월 29일 3번 나온다.
최종적으로 1592년 28세에 서자(庶子) 출신 홍계남 장군이 과거나 천거에 의하지 않고, 오로지 임진왜란이라는 국란 시 의병을 일으켜 세운 공(功)을 보고받아 알았던 당시 임금인 선조가 인정하고 종5품 수원 판관에 제수(除授)한 것이다.
여기서 제수(除授)란 조선 시대 과거나 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을 일컫는다.
그리고 1262호에 밝혔듯이 이 무렵 28세 의병장 홍계남 장군이 수원 판관(종5품)에 이어 절충장군(무신 정3품 당상관)에 제수(除授)되며 의병장 아닌 정규군 관료에 편입되며 신분의 벽을 완전히 깬 것이다.
그리고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수정실록] 25년 7월 1일 무오 18번째 기사>에는 <서인 홍계남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에 덧붙열 <서인(庶人)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계남은 양성현(陽城縣) 사람으로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의 첩의 아들이다. 담력과 용맹이 있고 말타고 활쏘는 데에 능하여 금군(禁軍)에 소속되어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었는데, 왜인들이 그가 말타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으므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언수가 의병을 일으켜…>라는 대목이 나온다.
홍계남 장군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점, 홍언수(홍자수)의 아들인 서자(庶子)라는 점, 금군 소속으로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운면 양촌리 출생으로 알려진 홍계남 장군을 여기서는 양성현(陽城縣) 사람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이채(異彩)롭다.
또한 <선조실록 32권, 선조 25년 11월 3일 기미 3번째 기사>에는 <비변사가 경성 회복을 위해 군대의 전진 배치 등을 아뢰다>에 덧붙여 <진용을 결성하고 병기(兵機)를 다 같이 논의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이 없으면 경성의 인심의 의지할 데가 없고 먼저 올라 돌격하여 제군(諸軍)의 선봉이 될 만한 자는 반드시 이들입니다. 기각의 형세 군사를 둘로 나누어 적을 견제하는 것. 마치 사슴을 잡을 때 한 사람은 사슴의 발을 붙잡고 한 사람은 그 뿔을 잡는 형세로 적을…>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홍계남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커다란 위상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수습, 타개하기 위해 전쟁 수행을 위한 조선 최고 기관인 비변사가 경성을 회복하기 위해 선조 임금에게 군의 작전을 보고하며 가장 중요한 것이 양주목사와 경기도방어사로 활동했던 고언백과 기호지방에서 의병 활동했던 홍계남 장군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계남과 고언백이 “없으면 경성의 인심의 의지할 데가 없고 먼저 올라 돌격하여 제군(諸軍)의 선봉이 될 만한 자는 반드시 이들입니다. 기각의 형세 군사를 둘로 나누어 적을 견제하는 것. 마치 사슴을 잡을 때 한 사람은 사슴의 발을 붙잡고 한 사람은 그 뿔을 잡는 형세”라는 것이고 경성 탈환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 중 홍계남 장군 관련 기록 중 28세의 서자(庶子) 출신 홍계남 장군이 금군 병사로 시작해 금군 통신사의 군관(軍官. 26세. 1590년)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임진왜란(1592년. 28세)이 발생하자 금군에서 왕의 특명을 받고 파견되는 순변사(巡邊使) 휘하로 상주와 충주 탄금대에서 패하고 고향에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그 공로로 수원 판관(1592년 28세. 선조 25)이 되며 신분의 벽을 허문 과정을 살펴봤다.
의병장 홍계남, 이덕남 장군 관련 기록들을 살피다 보니 조선왕조실록까지 살펴보게 됐다.
어쨌든 이왕 시작한 김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살펴볼 예정이다. (다음 호 계속)
최용진 기자 news66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