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1-05-08 06:32

  • 기획취재 > 우리동네 우리마을

안성교육 일번지라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마을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56] : 안성시 구포동 ⑥

기사입력 2017-07-02 06:40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구포동 여섯번째 기사를 싣는다.


1925년 안성초등학교, 일장기가 걸려 있는 학교 교사(사진출처 : 안성초등학교 100년사 수록사진으로 2008년에 발간된 근현대 안성의 도시·건축에 실린 사진이다).

구포동 마을 주민들은 구포동이 안성교육 일번지라고 자부한다.

그런데 그럴만하다.

안성초등학교와 안법고등학교, 안성교육청이 있는 마을이 구포동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안성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은 현재 안성초등학교의 전신으로 무려 115년 전인 1902년에 당시 안성군수였던 이종두(李鍾斗)가 세운 사립 안성소학교(私立 安城小學校).

그런데 안타깝게 안성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라는 위상에 비하면 설립초창기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을뿐더러 기존에 알려진 사실들도 잘못 알려진 것이 많다.

심지어 안성기략(1925)의 기록도 당시 관보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 사실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에 안성기략과 당시신문, 관보, 경기도보 등을 종합하여 학교 설립 초창기의 연혁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오류가 바로잡아지고, 이 글에서 못 밝힌 내용들이 연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 글의 오류가 있다면 수정되어 안성의 역사와 관련된 사실들이 제대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김동구 구포동 노인회장.

당시 안성군수에 의해 설립된 안성소학교

1902년 이종두 당시 안성군수가 기부금을 모금하고 민가를 매수하여 사립 안성소학교를 설립하는데 말 그대로 안성최초의 안성사람을 위한 근대교육기관이 탄생한 것이다.

안성사람을 위한이라고 한 것은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당시에 안성에는 이미 근대교육기관이라고 할 만한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인이 설립한 일어학교(日語學校)안성학교”(安城學校)가 그것인데 당시 안성에 있던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로 19002월 현재 일어학교는 서울과 안성을 비롯해 전국에 11곳 뿐이었다.

역설적으로 당시 안성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찌되었든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사립학교의 탄생은 단지 하나의 학교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는 애국계몽운동의 정신을 실천한다는 의미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학교 운영은 매우 어려워 겨울 난방연료가 없어 학업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후 1904년 당시 군수 이응종(李膺鍾)씨가 학부에 보고하고 공립(公立) 소학교로 승격시킨다.

그런데 당시 황성신문에서는 창건이라는 표현을 썼고, 학생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용승 구포동 통장.

일본인 교감에 의해 객사를 교사로 써

이어 보통학교령에 의하여 190741일자로 공립안성보통학교(公立安城普通學校)로 이름을 바꾸면서 교원이웠던 이무년(李茂年)을 교장으로 임명한다.(안성기략에는 광무10년 즉 19069월로 되어 있으나 당시 관보에 광무 11년 즉 1907년으로 되어 있어 관보의 기록을 따른다, 이하 내용에서도 안성기략과 당시 관보의 기록이 다를 경우 관보의 내용을 따랐다)

190811일자로 일본인 통정송태랑(筒井松太郞)이 교감으로 부임한다.

이 무렵부터 일제의 교육에 대한 통제가 본격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감으로 부임한 통정송태랑(筒井松太郞)이 한 일 중 하나가 당시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보관하는 객사의 일부를 학교 교사(校舍)로 사용하는 일이었다.

황성신문에 의하면 19082월경 통정송태랑이 이같은 건의를 한 것이 받아들여졌고, 안성기략에 의하면 6월에 객사를 수리하여 이전하는데 현재의 위치로 추정된다.

안성초등학교의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가 전시된 안성초등학교 느티나무 안성 역사관’.

일제강점기, 교장은 일본인

19096월에는 당시 김영진(金英鎭)안성군수가 교장을 겸임한다.

비슷한 시기 일본인 중산원시(中山源市)가 교감으로 임명되고 1910110일자로 새로 부임한 최태현(崔台鉉) 군수가 교장을 겸임한다

191111월 시행된 조선교육령에 의해 안성공립보통학교(安城公立普通學校)로 이름을 바꾸고 교감이었던 중산원시(中山源市)가 교장이 된다.

19124월에는 학교내에 안성공립간이농업학교를 부설하였고 19144월에는 여자부가 설치되었으며(2002년 발행된 안성초등학교 백년사에는 1911년으로 되어 있다), 19172월에는 교장이 교체되었는데 역시 일본인 교장이었고, 해방 될 때 까지 교장은 일본인이 맡았다.

경기도보에 의하면 19121학기말 현재 안성공립보통학교는 4학급에 5명의 교원, 신입생수는 77, 학기가 시작할 때 전체 학생수는 남학생 169명이었으나 학기가 종료될때는 130명으로 중도에 그만두는 학생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안성초등학교의 역사는 안성주민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져

이후 안성공립보통학교의 운영과 역사는 말 그대로 당시 안성읍내 주민들의 피땀 어린 정성이 배인 것인 동시에 안성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안성기략에 나온 1918년 박승육씨와 이택승씨 등의 기부를 시작으로 증축이나 증설 등 학교의 유지관리와 관련해서는 물론이고 학교 운동회 등에도 읍내 주민들의 기부가 줄을 이어 이루어진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박두진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안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등으로 진학하여 각 분야에서 활약하거나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 전통을 이어 안성초등학교는 안성 최고(最古)의 전통을 자랑하며 유지되고 있다.

설립 초창기 안법학교 모습(사진출처 :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1909년 안법학교 설립

앞에서 이야기한 안성성당과 공안국신부의 안성을 위한 공헌 중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학교 설립이다.

당시 안성의 유지들은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공안국 신부에게 학교설립을 요청하였고, 공안국 신부는 이러한 제안을 숙고 끝에 받아들여 1909115사립 공교 안법학교”(사립 公敎 安法學校)가 설립되고 공안국 신부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공교는 가톨릭을 의미하고, 안법학교의 은 안성을, ‘은 프랑스를 의미한다.

학교이름에서 천주교와 안성, 그리고 프랑스와의 인연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1912년 여자부를 신설하고 수녀원 건물도 신축해 안성여성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

안법학교는 설립당시 25명으로 시작했으나 1915년에는 남학생 30, 여학생 25명으로 늘었다.

공안국 신부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노동의 신성함을 가르쳐 학생들에게 짚신을 직접 만들어 신을 것을 교육했고, 방학때 부모 일을 도울 것을 권고했으며, 양반, 상놈 차별을 하지 말도록 교육했다.

안법학교는 19476월에인가를 받아 91일에 중학교를 개교하고 1951831일 인가를 받아 111일 고등학교를 개교한다.

안법학교는 1967년부터 천주교 수원교구유지재단에 소속되어 있다가 1983년 학교법인 광암학원이 생기면서 광암학원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광암은 한국 천주교 창립의 주역인 이벽(1754~1786)의 호로 법인의 이사장은 수원교구장이다)

19852월에는 안법중학교가 폐지, 1987년 남녀공학으로 학칙을 변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법고등학교 김영장 교장신부(오른쪽)와 이신휘 교감.

안법중고등학생, 4.19에도 앞장

안법 100년사”(2009)에 의하면 안법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주목할 점은 19604.19혁명 당시 안법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참여다.

안법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1960723일 학생과 학부모 등 800여명이 수업을 거부하고 서울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향했는데 그 이유는 자유당 후보인 오재영의 후보자 등록을 철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당시 내무부로부터 오재영의 입후보를 취소한다는 답변을 듣고 안성으로 돌아와 낙원공원에서 보고대회를 했지만 오재영 후보가 서울에서 깡패들을 데려와 당시 안법중고등학교 학생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안법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민주주의를 요구한 4.19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치열하게 싸웠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정의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는 가톨릭의 정신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구포동 주민들, 왼쪽부터 김동구 노인회장(1946년생), 박봉수(1929년생), 장순구(1934년생).

안성교육1번지라는 자부심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시절 관아와 그 부속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현재의 안성교육청 자리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가 있었고, 해방후에는 백성초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구포동에는 이렇듯 말 그대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안성초등학교와 안법고등학교가 있어 주민들은 안성 교육 1번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또 주민들은 구포동이 농사짓는 사람은 없지만 예로부터 일반공무원과 교육공무원이 많이 사는 동네라고 자랑했다.

구포동의 역사나 문화와 관련해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주민들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구포동 성당이 관내에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러한 구포동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주민들이 행복하고 살기좋은 구포동을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댓글3

스팸방지코드
0/500
  • 하얀민들레
    2017- 12- 14 삭제

    일본인 자제??? ㅋㅋ~~ 봉기자님, 빨리 고쳐 놓으세요. ''일본 아이들''로

  • 안법고홧팅
    2017- 07- 03 삭제

    글쎄요 예전 학력고사, 수능 , 정시에 강했던 학교가 최근 실적[?]이 저조한것처럼 보이죠 학생들은 더 우수해졌다는게 주변 사람들 애기입니다. 평준화된 용인쪽 수지구 아이들은 사실 서울쪽 아이들과 별차이 없는데 많이들 오니까요 수시입시제도가 사실 학생부싸움이라 잖아요! 열심히 공부한 만큼 소중한 결실도 나오려면 선생님들도 좀더 학생부에 심혈을 기울여주셔야 되지 않을지, 물론 지금도 잘해주시지만 다들 여기에만 목맨 학교들도 있는것 같구요 얼마전 법무부장관 낙마한 안경환 아들은 우리가 보기에 도데체 말도 안되는데 이런 말도 안되는 사실이 벌어지는게 현실이니 받아들여야지요

  • 전통의학교
    2017- 07- 02 삭제

    안법은 경기남부에서도 역사와 지명도있는 지역명문으로 압니다 신입정원을 못채우더라도 좋은 수업,교육환경을 위해 입학점수컷제도도 시도해볼만한 시기는 됐다고 봅니다 안성학생들이 반정도이고 나머지 용인,타지역이면 결국 면학분위기 보고 오는것 아니겠습니까? 지나온 100년 더 나가 앞으로100년의 안법을 기대합니다.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