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1-05-08 06:32

  • 기획취재 > 우리동네 우리마을

“백년에서 다시 백년으로” 안성과 함께 했고 함께 할 안성성당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55] : 안성시 구포동 ⑤

기사입력 2017-06-25 06:26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구포동 다섯번째 기사를 싣는다.


1922년 안성성당 신축직후로 추정되는 사진(사진출처 :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지금의 성당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한옥 건축양식을 많이 느낄 수 있다.

공신부 일기는 안성근현대사의 중요한 자료

현재 공개된 공안국 신부의 일기에는 안성의 의병운동과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내용 등 근현대사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일기에는 기존의 통념과 다른 부분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일기가 소개 된지 17년이나 지났는데도 거의 연구되지 않은 중요한 사실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학계의 연구에 따라 매우 귀중한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아쉬운 것은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이 부분도 기존 신문기록 등을 참고하면 상당부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또 공개된 일기뿐만 아니라 미공개된 일기 부분도 번역 공개되어 공안국 신부의 안성에서의 삶과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명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안성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안성인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공안국 신부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일 것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후손을 위해 해야 할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설명에 의하면 1955년 안성성당 종각 건물 건축직후의 모습이다. (사진출처 :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윤정중의 육필원고인 안성천주교회사

또 이 기사를 쓰면서 많이 참고하고 있는 윤정중의 육필원고인 안성천주교회사에도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당시 상황과 관련된 여러 기록이 남아 있다.

윤정중의 육필원고는 후손들에 의해 몇 해 전에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는데, 기자는 안타깝게 그 책을 구하지는 못했고 다만 그 책의 원본을 접한 적이 있어 이글을 쓰며 참고하고 있다.

윤정중의 육필원고와 안성천주교회사는 안성성당 창립 무렵 안성의 상황, 의병운동, 3.1운동, 안성천주교회 역사, 안성의 야사 등 안성과 안성의 천주교회사에 대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중 구포동과 관련된 내용 하나를 소개하자면 안성맞춤이란 말의 어원과 관련해 안성유기의 품질이 뛰어난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고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윤정중 선생은 이와 더불어 다른 한가지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이 앞에서 이야기한 홍건적의 안성침입과 관련된 것이다.

즉 홍건적의 난리가 안성에서 마쳤다고 해서 안성마침이라는 말이 생겼고, 이 말이 변해 오늘날의 안성맞춤이 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로 안성의 역사가 더욱 풍부해 질 수 있는 내용이다.

또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책의 필자인 윤정중 선생의 원고 집필과정과 그 집안의 신앙 자체도 연구하고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안국 신부의 일기와 안성천주교회사의 내용만 제대로 연구되고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안성의 역사와 안성사람들의 삶의 내용은 더욱 풍부해 질 것이다.

정면에서 바라본 안성성당.(지금은 구성전이라 불린다)

안성성당, 20년 만에 새 성당 건축을 결의

고독한 6년을 보내면서 안성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공안국 신부는 이후 안법학교의 설립을 비롯한 많은 일들을 하고 또 안성성당을 중심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는 그대로 안성의 근현대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파란만장한 것이다.

앞에서 간략히 이야기한 의병운동이나 3.1운동 관련 이야기를 비롯하여 제대로 기록하려면 책 한권으로도 모자를 것이다.

여기서는 주로 성당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을 간추려 이야기하자면 1920년은 공안국 신부가 안성에 온지 20년이 되는 해일뿐만 아니라 신부가 된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안성성당에서는 기념식을 거행했고, 이를 계기로 각 공소의 신자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성전을 짓기로 한다.

그리하여 신자들의 피와 땀이 맺힌 소를 팔고 땅을 팔아 모금했고, 공안국 신부도 프랑스에서 지원금을 보충하여 1922년 봄 성당 건축을 시작한다.

여기서 신자들의 피와 땀이 맺힌이라는 표현은 그냥 듣기 좋게 꾸며 이야기하는 말이 아니다.

안성성당 박요셉 주임신부.

신자들의 피와 땀이 맺힌 돈으로 1922년 성당 신축

박해시절 산골짜기 등에 숨어 지내며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을 하며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모은 돈이기에 말 그대로 피와 땀이 맺힌 돈인 것이다.

자재는 보개면 동안리에 있던 30칸짜리 기와건축물인 동안강당을 1,010(당시 황소 한 마리 80)에 매입해 그 중 기와와 돌, 목재들을 활용했다.

또 기둥과 들보는 압록강 인근 재목으로, 그리고 그 외의 나무는 충남 서산에서 사들여 건축을 시작했다.

성당터를 닦고 건물을 짓는 일에 신자들은 물심양면으로 협조하였다.

그 중 신축공사를 지휘했던 사람으로는 박호연, 윤관병, 김중묵 등 세 사람이라고 한다.

박해를 피해 산골짜기로 숨어 다니던 천주교 신자들 입장에서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상업도시의 한복판, 관아건물 바로 옆에 최신식의 천주교 성당을 짓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뜻깊은 일이었을 것이다.

윤관병씨는 병이 매우 심한 가운데서도 얼씨구나 좋구나, 군란때 숨어서 쫒겨 다니던 우리가 이제는 성당을 지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고 자신의 심경을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19228월에 40칸에 아래층만 86평 되는 2층 성당을 완성해 94일에 감격의 첫 미사를 보았는데 당시 모인 신자 수가 500여명이었다고 한다.

안성성당 사목회 최병도회장.

종각을 지어 현재의 성당 모습을 갖추다

성당을 상징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겠지만 안성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성당 건물 자체와 더불어 하루에 세 번씩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였을 것이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사람들은 성당이나 교회 종소리를 통해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는데 안성성당의 종소리는 던지실(지금의 금광면 개산리 일대)까지 들렸었다고 한다.

안성성당의 은 이렇듯 안성성당을 상징하는 동시에 안성성당의 건축에도 큰 영향을 준다.

안성성당은 성당이 창설된 이후 1915년경 까지는 종이 없었다.

당시 성당의 종은 단순한 종이 아니라 시계역할도 할 때였는데, 서울 사는 고경운이라는 사람이 종을 사서 보내주었는데 이 종은 194112월까지 사용한 후 일제가 헌납을 강요해 빼앗아 갔다.

이후 안성성당에는 종이 없다가 종을 들여올 계획을 세우고 임세빈 신부시절인 1953년에 종각 건축 공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백 척 높이의 종각건물이 1955년에 완공되는데 이로써 안성성당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성당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종각에는 독일에서 직경 3, 무게 반톤 되는 거대한 종을 구해와 달아 195612월에 첫 타종을 했다.

현재 이 종은 안성성당에 남아있는데 종에는 1954128일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 연월일이 표기되어 있다.

이외에도 안성성당에는 세례대, 고해틀, 각종 제의 유물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고, 이들 유물과 사진 등을 모아 보관하고 있는 기념관도 별도로 있다.

안성성당 사목회 박종권 문화재 분과위원장이 성당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동서양의 만남, 안성성당의 건축적 의미

안성 성당 건물은 1985년 경기도 지방 문화재 기념물 제 82호로 지정되었는데 서양 건축양식과 동양 건축양식의 절묘한 조화로 손꼽힌다.

이러한 건축양식이 가능했던 것은 공안국 신부의 토착화에 대한 의지가 작용한 결과로 생각된다.

안성시민연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한 권용일 씨는 2009년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 안성성당 경관 변천 과정에 관한 연구에서 “(안성성당은) 건축양식에 있어서도 동양과 서양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는데 정통 서원건물의 부재와 압록강 목재를 이용한 전통한옥양식에 서양의 천주교의 장방형 구조가 상징적으로 결합된 한.양 절충식 한옥성당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고딕양식의 종탑이 결합되어 더욱 독특하고 아름다운 성당경관이 탄생하였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건축적 의미 외에도 안성성당은 1928년 평택성당, 1959년 미양성당, 1970년 대천동 성당, 1981년 죽산성당, 1992년 던지실 성당 등을 분리 독립시켰으며, 1981년에는 안성신용협동조합을 창설하기도 했다.

지난 2000년 백주년을 맞이한 안성성당은 새로운 백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도 안성성당은 구포동에 의연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늘 곁에 있는 것은 그 소중함을 잘 모른다.

안성성당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매우 뜻 깊은 것이어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성사람들에게는 축복이라 할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댓글1

스팸방지코드
0/500
  • 윤병삼
    2017- 06- 27 삭제

    기사내용 잘 읽었습니다.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