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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5-08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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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국 신부가 안성에 오고 안성성당이 설립되다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54] : 안성시 구포동 ④

기사입력 2017-06-18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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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구포동 네번째 기사를 싣는다.


공안국 신부.(사진출처 :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안성 천주교 신자들, 500불을 모아 성당터를 확보하다

안성천주교회사백년에서 다시 백년으로” (2000) 등 자료에는 안성성당 설립초기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안성성당이 설립될 무렵 안성주변에는 지금의 아산시에 있는 공세리 본당이 1895년에 설립되어 있었고 1896년에는 현재의 양성면에 미리내본당이 설립되었고, 같은 해 장호원 본당이 설립되어 있었다.

안성과의 거리는 미리내 본당이 더 가까웠지만 당시 천주교의 체계상 안성은 공세리 본당에서 관할하면서 신부님들이 안성주변의 각 공소를 순회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당시 공세리 본당신부였던 드비즈 신부는 1900910일자로 교구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성지방의 신도들이 500불을 모아 성당터를 확보하였고 많은 신자들이 있으니 안성에도 별도의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1930년대 안성성당과 안성풍경, 사진 오른쪽으로 안성성당이 보인다.(사진출처 :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상업도시로서의 장래성을 보고 성당이 들어서다

당시 신도들이 500불을 모아 확보한 성당터는 당시 통진군수(현재의 김포시 일원)를 지낸 백씨가 살고 있던 터로 성당터가 2,000, 기와집 15, 초가집 10칸짜리 두채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신부들이 귀한 시절이고 인근에 본당이 없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가까운 곳에 본당이 2곳이나 있어 상대적으로 본당 설립의 필요성이 크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한 안성주변에는 공소가 많았고 신자들도 있었지만 정작 안성성당이 들어설 안성읍(여기서 이야기하는 안성읍은 동리, 서리, 장기리를 이야기하는 좁은 의미의 안성읍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분석된다)에는 ()요셉이라는 사람의 집 단 한집뿐이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성당터가 확보되었다고는 하지만 본당 설립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성인근 공소 신자들의 요청과 안성은 상업도시라 장래성이 크다는 설득이 계속되었고,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 안성천주교회사의 설명이다.

▲ 1900년대 초 공안국 신부와 안성성당 신자들.(사진출처 :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19001019일 공안국 신부 부임

그런데 신자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당시의 객관적인 여건이 안성성당을 설립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1900109일에 한꺼번에 6명의 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 6명의 신부는 모두 그해 8월 파리 외방선교회 신학교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선교사의 길에 나서 대한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즉 안성신자들의 요청에 응할 수 있는 선교사가 확보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안성에 온 것이 공안국(공베르, Gombert, 孔安國, 1875~1950) 신부다.

안성성당의 설립시기와 관련해 공안국 신부가 부임한 19001019일을 기준으로 해서 보는 견해와 공안국 신부가 정식으로 발령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19012~3월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안성성당에서는 지난 2000백년에서 다시 백년으로를 발간하고 기념성전을 건축한 바 있다.

공안국 신부와 동생신부.(사진출처 :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공안국 신부 형제자매 9남매 중 9명이 성직자

공안국 신부는 19001019일 안성에 도착해 19329월 안성을 떠날 때까지 32년간 안성성당 신부로 재임하면서 안성천주교 신앙은 물론이고 안성근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큰 흔적과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공안국 신부에 대해서는 백년에서 다시 백년으로에 구체적이고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특히 공안국 신부의 일기가 부분 번역되어 있는데 이 자료는 안성성당과 천주교와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당시 안성과 관련해 의병운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는 공안국 신부와 안성의 천주교와 관련된 내용 등을 소개한다.

공안국 신부는 프랑스의 캄블라제라는 조그마한 농촌마을에서 9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모의 신앙심이 매우 깊어 9남매중 남자형제 4명은 신부가 되었고 자매 3명은 동정녀로 살았다.

공안국 신부는 어려서부터 외국선교의 뜻을 품고 바로 아래동생인 줄리엣 공베르 신부와 함께 신학교에 입학해 1900년 사제서품을 받고 안성으로 오게 된 것이다.

공안국 신부와 포도, 공안국 신부가 안성에 들여온 포도는 미사용으로도 쓰였지만 포교를 위해서도 쓰였다.(사진출처 :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한국의 첫인상과 안성에 대한 묘사

공안국 신부가 당시 한국에 대해 남긴 첫인상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공안국 신부가 1920년에 사제승품 20주년 기념식 석상에서 이야기 한 것이라고 하는데 부산항 해변가에 초가집이 즐비하다. 이초가집이 많은 것을 보아, ! 한국은 부자다. 살기좋은 곳이다.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초가집이 많은데 부자라고 생각한 이유는 유럽에서는 초가집이 가축을 기르는 집이므로 가축을 기르는 초가가 많은 한국이 부자로 생각했는데 막상 상륙해서 그 초가집에 사람이 사는 것을 보고 불쌍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안국 신부 일기에는 안성에 대해 수도 서울에서 7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안성, 산길을 이틀 쯤 걸어오다 마지막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세 개의 민둥산 사이에 넓은 반원 지역이 펼쳐져 있다. 이곳이 안성이다. 모양이 똑같은 나지막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이에 고관의 집이 하나 있고 이웃에 두 개의 기와집이 있을 뿐이다고 묘사했다.

서울과의 거리 등에 있어 부정확한 내용도 보이지만 당시의 안성에 대해 알게 해 주는 내용이다.

공안국 신부의 프랑스 생가.(사진출처 :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고독했던 첫 6, 병자를 돌보며 신앙으로 견디다

또 다른곳에서는 철도 문명에는 관심 없이 고전적인 도시로 남아 있는 이 도시는 한국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상업도시들 중 하나이다.

교통이 매우 편리한 지역인데다가 산업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유기 그릇, 담배 파이프, 가죽공장, 제화공장, 종이, 솥 공장들로 안성은 유명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공안국 신부는 부임 후 첫 6년을 매우 고독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심지어 부임 1개월이 지났을 때는 안성 사람들이 공안국 신부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식생활의 변경과 정신적 압박감 등은 건강에도 문제를 일으켜 이질과 변비, 위장장애 등의 질병을 앓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공안국 신부는 값을 따지지 않고 병자에게는 약을 나누어 주고, 포도를 나누어 먹으며 안성사람들 곁으로 다가가 신앙을 전파했다.

그리고 의병운동 등 혼란한 속에서 공안국 신부는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안성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크게 기여해 안성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다.

19193.1운동때에도 안성의 지도자들에게 독립운동 방법에 대해 자문해주는가 하면 일제의 보복으로부터 독립운동 참가자들을 성당으로 피신시켜 보호해 주기도 한다.

이러한 3.1운동과의 인연으로 1980년대까지 안법고등학교에서는 3.1절이면 전교생과 교사가 모여 기념식을 했으며 민족 대표 33인으로 분장하고 가장행렬 행사를 하기도 했다.

금광면에 거주하는 이필구(1938년생) 동문이 고등학교 3학년때 3.1운동기념 가장행렬후 찍은 기념사진, 195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검소했던 공안국 신부

그리고 공안국 신부는 생활에 있어 끼니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교육에 헌신해 정작 자신은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담배는 피웠지만 당시 가장 싼 담배를 피웠고, 모자는 10년을 썼는지 20년을 썼는지 모를 지경이었고 떨어진 옷은 기워 입었다고 한다.

관련된 일화 하나가 전해지는데, 양복 입은 청년이 길에서 공안국 신부를 보고 불란서 거지로군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안국 신부는 내 모양은 당신 말대로 거지같지만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학교를 경영하여 조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소, 그래서 내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이오, 옷 잘 차려 입은 당신은 학교를 몇 개나 경영하시오?”라고 응대하자 그 청년이 얼굴이 붉어져 도망갔다고 한다.

공안국 신부는 1932년 안성을 떠나 용산 신학교로 갔다가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19501112일 평안북도 중강진 인근에서 별세했다. (다음호에 계속)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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