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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5-08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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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와 객사가 있던 곳에 천주교 성당이 들어서다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53] : 안성시 구포동 ③

기사입력 2017-06-11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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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구포동 세번째 기사를 싣는다.


양촌집에 실린 극적루기 본문중 일부.

극적루와 관련해 1398년에 권근이 극적루기를 지었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극적루기에는 극적루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안성의 역사와 관련해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먼저 극적루기는 권근이 지었음이 분명하지만 그 내용에는 “(정수홍이) 향학(鄕學)의 장() 정한(鄭翰)을 서울에 보내어 양촌(陽村, 권근의 호)에게 편지를 통해 말하기를이라는 표현이 있다.

즉 극적루기 내용중 상당부분은 당시 안성군수였던 정수홍이 권근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위의 구절을 통해 안성향교의 연혁을 짐작할 수 있는 정보를 알 수 있다.

이미 명륜동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향학(鄕學)의 장()?정한(鄭翰)을 서울에 보내어라는 구절을 통해 극적루기가 쓰여 진 13985월 이전에 안성에 향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013년 복원된 극적루에 걸려 있는 극적루 복원기.

극적루기에 표현된 600여년 전 안성모습

다음으로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묘사한 안성의 모습이 남아 있어 주목된다.

엄밀히 말하면 당시 안성군수로 부임한 정수홍의 시각으로 본 극적루에서 본 안성풍경일 것이다.

아마도 극적루기를 적는데 도움이 되라고 적어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권근은 그 문장을 그대로 기록했다.

정수홍의 문장 자체가 의미있다고 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그런 사실을 극적루기에 그대로 적어놓은 권근의 인품도 엿볼 수 있다.

극적루기에는 극적루에 대한 권근의 생각도 적어 놓았는데, 이에 대해 안성시지(2011)에서는 “(권근은) ‘극적의 의미를 내면화해 철학적으로 풀이한다. , 그는 극적의 의미를 외적의 격퇴라는 사실에 한정하지 않고 우리 내면의 적을 스스로 이겨 내는 심성 도야의 차원으로까지 확대시켰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안성시지(2011)에 번역되어 있는 정수홍이 묘사한 극적루에서 바라본 안성의 풍경이다.

이 누의 경치를 말하자면, 가깝게는 산이 동북쪽에 자리해 푸른 솔과 높은 나무가 울창하고 그윽하며, 남쪽에는 큰 냇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그 안쪽에 10여 채 소민(小民)의 집이 띄엄띄엄 있고, 바깥쪽에는 편평한 밭 수십 이랑이 펼쳐져 있다. 뽕나무와 삼이 밭 경계에 잇닿았고, 벼농사가 논배미에 가득하다. 봄에 갈아 여름에 김매고, 아침에 갔다 저녁에 돌아온다. 무릇 고을 사람으로서 이 지역에 일이 있는 자는 모두 고개만 숙이면 볼 수 있다. 멀리는 천흥산(天興山)과 청룡산(靑龍山)의 봉우리가 머리를 넌지시 내밀면서, 조회하는 듯 읍하는 듯, 병풍처럼 옹위하고 고리처럼 벌여서, 시계(視界)가 끝이 없다

1842-1843년에 편찬된 경기지에 포함된 안성지도, 지도 가운데 육명루 혹은 대명루로 읽을 수 있는 2층 누각이 보인다.

경기지에 표현된 육명루에 대해

이렇듯 옛 기록 하나를 통해서도 안성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이고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심성과 사상까지도 엿볼 수 있다.

극적루기가 남아 있는 안성의 역사와 문화와 극적루기가 남아 있지 않은 안성의 역사와 문화는 말 그대로 천양지차일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문화의 힘, 문화유산의 가치, 역사의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극적루에 대한 자료를 찾아 살피면서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다.

1842년에서 1843년 사이에 만들어진 경기지(京畿誌)에는 안성과 관련된 내용뿐만 아니라 안성과 관련된 지도도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지도 중앙에 안성의 관공서 건물과 객사 등이 표현된 곳에 육명루(六鳴樓) 혹은 대명루(大鳴樓)로 표기된 2층 건물이 보인다.

그 위치로 보아 극적루가 있었던 자리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그 이름이 극적루가 아닌 육명루, 혹은 대명루로 표기되어 있다.

육명루로 읽는다면, 극적루와 관련해 세종실록지지리에 기록된 홍건적의 괴수 6명을 벤 것과 연관해 극적루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는 것이 김태원 전 안성문화원장의 의견이다.

혹은 극적루가 사라진 뒤 안성사람들이 다시 세웠던 건물일 수도 있다.

이 육명루 혹은 대명루에 대해서 현재까지는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수수께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안법학교가 설립될 무렵(1909)의 안성성당과 안법학교, 오른쪽 위에 보이는 건물이 안성성당이고 중앙에 보이는 건물이 안법학교다.(사진출처 : 안법고등학교 홈페이지).

안성의 중심지에 들어선 안성성당

극적루가 사라지고, 조선도 사라지고, 조선의 맥을 이은 대한제국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1900년 대한제국 안성군청 바로 옆자리에 천주교 안성성당(구포동 성당)이 들어선다.

불과 수 십 년 전인 1846년 병오박해로 조선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참수당하고, 1866년 병인박해로 최소 8,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886년 프랑스와 수교를 맺으면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락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깊은 산속에 숨어 신앙생활을 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안성성당의 설립은 천주교 신앙이 안성 민중 속에 뿌리내린 것을 상징하는 사건과도 같은 것이며, 안성천주교 신앙의 깊고 단단한 뿌리가 맺은 열매이기도 하다.

1929 3월 촬영된 미리내 본당 초대 주임신부였던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의 장례식 모습, 많은 신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안성에서는 일찍부터 천주교가 주민들 사이에 자리잡았다. 양성면 미산리에서 확보하지 못했던 사진을 여기에서 소개한다.(안성문화원 제공).

안성에 천주교 들어온 것은 늦어도 19세기 초

안성의 천주교 최초의 전래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19세기 초에는 이미 상당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846년 조선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 목숨을 걸고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가져와 현재의 양성면 미산리에 묘를 쓴 것이 그 대표적인 근거다.

목숨을 걸고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셔왔다는 것은 그만큼의 깊은 신앙은 물론이고, 개인이 아니라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행정구역상 일죽면에 있는 죽산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최소한 24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이는 당시 죽산일대에 많은 천주교 신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뿐만 아니라 행정구역상 안성은 아니지만 안성과 경계에 있는 박해시절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공동체이자 순교지인 배티성지가 있다.

이렇듯 안성에서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안성이 서울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한남정맥이나 금북정맥 산줄기가 이어져 박해를 피해 숨어서 생활하기 좋은 자연환경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지난 2000년 안성성당 1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100주년 기념성전.

안성의 문화적 지리적 환경이 천주교 뿌리내리는데 일조

뿐만 아니라 안성이 전국 삼대시장의 하나로 이야기되는 상업도시였다는 점도 무시 못 할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즉 시장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문물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이 깊은 산속에 은거해 살면서 생계수단으로 담배농사와 숯과 옹기 등을 만들어 팔았고 소금장수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물품들을 팔고, 생활용품을 구입하는데 있어 안성시장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러한 점도 직간접적으로 안성인근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들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현재까지 본격적으로 연구되지는 않았지만 조선후기에 안성에 남파 홍우원으로 대표되는 남인계열의 학자들이 활동했던 것도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천주교는 주로 남인계열 학자들 사이에서 먼저 수용되고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안성성당이 만들어지기 전에 안성인근에는 많은 공소(公所,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지역신자들의 모임장소)들이 있었다.

안성인근에 있던 공소들

안성천주교회사백년에서 다시 백년으로” (2000) 등에 의하면 안성성당 설립을 전후해 안성인근에 있던 교우촌과 공소는 참나무 장이(혹은 참나무정이, 삼죽면 진촌리), 선바위(금광면 오산리), 유왕골(서운면 양촌리), 갈전리(미양면 갈전리), 바울(미양면 마산리), 질구비(미양면 후평리), 용머리(공도읍 진사리), 팔머리(공도읍 승두리), 완골(보개면 오두리), 건지미(대덕면 건지리), 통복꺼(혹은 낭떠러지기, 평택시 통복동), 대추리(평택시 팽성읍), 가마골(평택시 서탄면 적봉리), 황새울(평택시 고덕면 문곡리), 토나루(평택시 청북면 토진리), 신흥리(평택군 팽성읍), 우어리(천안시 성환읍), 주막거리(천안시 성환읍), 월경(천안시 성환읍), 시리목(천안시 북면), 씨아골(천안시 북면), 용진(진천군 백곡면), 삼박골(진천군 백곡면), 은골(진천군 백곡면), 배티(진천군 백곡면) 등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극적루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안성(구포동)성당 남쪽으로 서운면 청룡산과 천안시의 북면이 속해 있는 성거산이 보인다.

또 동남쪽으로 금광면 배티고개를 넘으면 바로 배티성지다. 이렇듯 안성성당의 위치는 역사적으로나 자연환경적으로 남다른 의미를 가진 곳에 자리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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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일재밌는연재
    2017- 06- 11 삭제

    알고보면 서울 한강변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천주교성지인데 개발에 밀려 그냥 묻혀있는게 대부분...... 합정동인 지금 절두산에서 ~ 새남터[동부이촌동]~ 왜고개[용산]까지는 대단한 성지이다 한강변 새남터[동부이촌동]에서 참수당한 김대건 신부를 이불보따리에 말아서 지게에 짊어지고 왔을 것이다. 지금 미루어 짐작해보면 성당과 성지가 많았다는 건 그만큼 신념들이 대단한 사람들이 모여산다고 봐야지.....이걸 좋은쪽으로 계승 발전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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