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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5-08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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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을 물리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극적루가 있던 동네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52] : 안성시 구포동 ②

기사입력 2017-06-04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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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구포동 두번째 기사를 싣는다.


2013년 복원된 극적루.

구포동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안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의미있는 건축물 중 하나가 있었다.

바로 극적루(克敵樓)인데 극적루는 관아 건물은 아니지만 관아와 함께 인근에 있었고 그 건립 배경이 매우 의미있는 건물이다.

극적루는 한자표기 그대로 적을 이긴것을 기념해 세운 누정으로 고려 공민왕시절인 1361년 홍건적이 두 번째로 고려를 침입했을당시 안성사람들이 지혜를 모아 홍건적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1363년 세운 건물이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다양한 역사서와 지리지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되고 이후 기록의 토대가 되는 기록이 고려말, 조선초에 활약했던 성리학자였던 권근(權近,1352~1409)의 문집인 양촌집(陽村集)에 실린 극적루기”(克敵樓記, 1398)이며, 극적루기에 실리지 않은 일부내용이 세종실록(1454년 편찬 완료)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옆에서 본 2013년 복원된 극적루와 극적루 안내문..

2013년 복원된 극적루

뿐만 아니라 극적루에 대한 안성사람들의 관심은 끊이지 않아 안성에서 여러번 편찬된 각종 안성군읍지에 극적루와 관련된 내용이 빠지지 않았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안성에서는 안성문화원과 향토사학자 등을 중심으로 극적루를 복원하자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어 극적루에 핀 민족혼”(1995), “안성극적루 조사 보고서”(1997) 등의 단행본이 발행되고 2004년에는 안성문화원에서 극적루와 관련된 학술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극적루에 핀 민족혼을 저술한 윤범하 등을 중심으로 홍건적을 물리친 안성사람들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현재의 옥천교 부근에 고려안성호국영령지단”(高麗安城護國英靈之檀)이라는 이름의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극적루 복원을 바라는 시민들의 요구에 힘입어 안성시는 극적루 복원 타당성 검토 학술용역을 실시해 지난 2011년 보고서가 발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극적루 복원에 들어가 지난 20136월 봉산로터리에 복원 준공했다.

극적루가 있었던 교육지원청 인근의 수백년 묵은 나무들.

인근 고을 모두 항복했을때 홍건적 물리친 안성사람들

홍건적의 침입과 극적루의 초창(初創)에 대해서는 그 의미가 남다른 만큼 당시의 사료와 후에 나온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상황에서 홍건적으로부터 두차례에 걸쳐 침략당했다.

홍건적(紅巾賊)은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에 저항한 한족(漢族)들의 반란군인데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다고 해서 홍건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1차침입은 1359년이었고, 2차 침입은 1361(고려 공민왕 10)이었는데, 당시 공민왕은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안동까지 피난을 가야할 만큼 국가전체가 위기에 몰렸다.

특히 홍건적은 매우 잔학해 일반 민중들의 고통이 컸는데 도처에 민중들의 시체가 쌓였고, 홍건적이 온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2차 침입당시 안성 북쪽에 있던 30여개의 마을은 홍건적이 온다는 풍문만 듣고도 자진해서 항복했고, 심지어 공복을 입고 나가서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성사람들은 용기를 내고 힘과 지혜를 모아 홍건적을 물리쳤고, 홍건적의 남하를 저지하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이다.

당시 안성사람들이 홍건적을 물리친 상황은 각종 사료에 비교적 간단히 설명되어 있다.

권근의 극적루기에 의하면 온나라가 망하게 되어 막을 길이 없었는데 오직 안성만이 앞장서서 의기를 분발하여 거짓 항복하는 체 잔치를 차려 홍건적이 취하자 그 장수를 죽였고 그로 말미암아 홍건적이 도망쳤고 (홍건적)이 남으로 내려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외에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 때 죽인 적의 장수가 6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지난 1996년 옥천교 부근에 세워진 고려안성호국영령지단”.

홍건적을 물리친 것은 안성사람 전체의 공

이를 통해 안성사람들의 남다른 호국정신과 지혜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안성시지(2011)는 매우 중요한 평가를 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 특별히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즉 누구 특별한 한 두사람의 공이 아니라 안성사람 전체의 공이기에 홍건적을 물리친 것이 더욱 뜻 깊다는 것이다.

한편 안성에서는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친 이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해 한가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34호 안성향당무”(2002)에는 안성의 향당무와 관련해 여러 전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버들애기와 관련된 전설이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당시 가무재인이었던 버들애기가 홍건적의 침입을 예견하는 꿈을 꾸었고 이 내용을 고을 원님에게 알려 잔치를 준비했고 버들애기 등이 잔치에서 춤을 추어, 적들을 취하게 한 후 적장의 목을 베었다. 그렇지만 버들애기는 시기하는 이의 모함을 받았고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유청자 향당무 전수조교가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650년전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전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무슨 이름난 장군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성시지의 평가와 일맥 상통한다고 할 것이다.

두 번째 보이는 느티나무가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다.

현에서 군으로 승격

홍건적을 물리친 공로로 안성은 이듬해인 1362년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게 되고, 가장 먼저 항복한 지역중 하나인 수원은 주()에서 군()으로 강등되었으며 수원에 속해 있던 양량(陽良), 감미탄(甘彌呑), 마전(馬田), 신곡(薪谷) 4개의 부곡이 안성에 편입하게 된다.

군으로 승격한 이듬해인 1363년 군수로 부임한 신인도(愼仁道, 안성최초의 군수로 생각된다.)가 홍건적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누()를 지었으나 이름을 짓지는 못했다.

이후 36년쯤 후에 안성군수로 부임한 정수홍(鄭守弘)이 권근에게 편지로 부탁하여 권근이 1398년에 극적루기를 지은 것이다.

이후 극적루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7세기 전반까지는 극적루와 관련된 시문(時文)이 남아 있고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안성군읍지(安城郡邑誌)에 극적루가 없어졌다고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18세기경 없어진 것을 분석된다.

극적루의 원위치에 대해서는 추정할 수 밖에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객사의 동쪽에 위치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대부분 현재의 안성교육청 인근으로 추정하고 있고, 안성시지(2011)에서도 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안성교육청과 주변에는 지금도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고, 옛 석재들이 남아 있다.

그 중 한 그루는 지난 1981311일 안성에서는 첫 번째로 지정된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당시 수령이 650년이었고, 높이가 15m, 둘레가 7m에 달하는 거목이다.

나무의 수령으로 보아 극적루 건립무렵에 심어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또 교육청 인근에 있던 석재 중 하나는 안성교육청에서 지난 2015년 수습하여 안내문과 함께 잘 보관하고 있다.(다음호에 계속)

2015년 교육청에서 세운 안내문과 석재.

2006년 교육청부근에 있던 석재.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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