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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5-08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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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동헌과 객사 비롯한 관공서가 밀집해 있던 동네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51] : 안성시 구포동 ①

기사입력 2017-05-28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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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구포동 첫번째 기사를 싣는다.


안성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유적비, 1998년 안성초등학교 초대 학교 운영위원들이 세운 것으로 이곳이 안성교육지원청 자리와 함께 조선시대에 동헌, 객사 등이 있었던 곳임을 기록해 놓았다.

구포동(九包洞)이라는 지명은 1947년에 생긴 지명이다.

구포동이라는 지명이 생긴 과정을 살펴보면 구포동이 속한 지역은 조선말과 대한제국 시절에는 안성군 동리면(東里面)에 속해 있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성군 읍내면(邑內面)에 속하게 되는데 읍내면은 이후 1931년 안성면으로 바뀌고 1937년에는 읍으로 승격해 안성읍이 된다.

1943년에 행정구역 지명에 일본식 정()제도가 도입되면서 동리(東里)는 여러개의 정()으로 분리된다.

그 중 하나로 동본정 2정목(東本町 2丁目)이 생기는데, 오늘날 구포동지역이다.

즉 동본동 2정목 지역이 1947년 행정구역에서 일본식 지명을 없애면서 구포동이 된 것이다.

구포동이라는 이름은 비봉산을 감싸고 있는 구포산(九包山)에서 유래한 것이다.

멀리서 본 유적비풍경.

조선시대 관공서가 밀집해 있던 동네

살펴본 것처럼 구포동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은 얼마되지 않지만 안성의 역사에 있어서 구포동이 갖는 위상과 의미는 남다른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관공서라고 할 수 있는 공해가 밀집해 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공해는 관아(官衙), 관서(官署)라고도 하는데 관원들이 집무를 보던 건물, 관에서 지은 관과 관련된 건물 일체를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관공서와 그 부속건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구포동에 공해가 있었다는 사실은 지명유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제가 1911년경 만든 조선지지자료에 보면 동리면 본리(本里)아병동(牙兵洞, 아병청 골목)”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현재의 구포동 지역으로 생각된다.

아병청(牙兵廳)은 조선후기 지방군사조직에 속해 있던 병사인 아병(牙兵)을 관리하던 관공서다.

그런데 이 아병청은 1899년에 만든 안성군읍지(안성군읍지)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폐지되었거나 명칭이 바뀐 것으로 분석된다.

그렇지만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조선지지자료에 기록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8세기초에 만든 해동지도에 표시된 안성객사와 관아, 안성객사에는 배례단이 보이는데 이러한 점이 복원시에 참고되었다.

안성에 있던 다양한 조선시대 관공서

공해는 역사드라마 등을 통해 익숙한 오늘날의 시청이라고 할 수 있는 동헌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지역에 따라 또 시대에 따라 조금씩 그 구성이 다르다.

18995월에 편찬된 안성군읍지(안성군읍지)에는 안성의 공해로 객사(客舍), 아사(衙舍), 동헌(東軒), 향청(鄕廳), 순교청(巡校廳), 양사청(兩司廳), 서기청(書記廳) 등이 그 규모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들 공해의 역할등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것도 많은데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등을 참고해 현재 확인 가능한 것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객사(客舍)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다른 곳에서 온 관원들이 묵어가는 역할을 하던 곳인 동시에 전패(殿牌 :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로, ‘(殿)’자를 새김)를 안치하고 고을 수령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향망궐배(向望闕拜 : 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림.)하던 곳이다.

아사(衙舍)는 일반적으로 동헌을 뜻하는데 뒤에 동헌 항목이 별도로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지방관의 생활처소인 내아(內衙)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헌은 널리 알려진대로 그 지역의 수령 즉 지방관과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로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여기서 행해졌다. 오늘날로 보면, 시청이라고 보면 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內衙 : 西軒이라고도 함)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헌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향청(鄕廳)은 조선시대에 지방의 수령을 자문하고 보좌하던 지역사회의 자치기구인데 조선초기에는 유향소(留鄕所)라 부르다가 임진왜란 이후 대개 향청이라 불렀다.

순교청(巡校廳)은 오늘날의 경찰 업무를 수행한 기관으로 1894년 갑오개혁기에 각 지방 관아에 설치되었고, 오늘날의 경찰관에 해당하는 순교가 소속되어 있었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중 가장 중요한 건물

광여도에 표시된 안성객사.

안성의 관아와 관련 건물들은 현재의 안성초등학교와 안성교육지원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50년경에 제작된 해동지도 등 고지도에 나온 관아의 위치와 안성시지(2011)에서 분석한 내용에 의하면 현재의 안성교육지원청자리가 관아의 중심이 되는 동헌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안성초등학교 서남쪽에 객사가 위치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다른 건물들도 이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져 지금은 그 흔적조차 볼 수 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객사는 그 흔적이 남아 있었고, 지난 199511월부터 19976월에 이르기까지 해체 복원되었다.

또 그 내용이 안성객사 해체중건공사 보고서”(2000)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고 우리동네 우리마을보개면 신양복리에서 그 내용 일부를 정리해 소개한 바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극적루에 대해 소개하면 객사는 봉건왕조인 조선시대 지방 관공서중 가장 중요한 건물 중 하나였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객사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 즉 전패를 두고, 한달에 두 번씩 임금에 대한 예를 올렸던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보개면 신양복리에 복원되어 있는 안성객사.

안성객사가 만들어진 것은 고려말

안성객사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건축수법이나 기록 등을 통해 고려 말에는 만들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안성객사 해체중건공사 보고서다르면 안성객사는 건축적으로 조선시대 객사 건물 중 가장 건립연대가 오래된 건물이며, 고려말 조선 초기 주심포 형식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건축양식에서 고려 말 양식의 흔적이 남아 있을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객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객사라는 것이다.

또한 뒤에서 이야기할 극적루가 객관 즉 객사의 동쪽에 있었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기도 하다.

이렇듯 건축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안성객사이지만 근대에 접어들면서는 우여곡절을 격게 된다.

1952년 양정중학교 안성동창회원들이 찍은 기념사진, 뒤로 보이는 한옥이 당시 명륜중학교 교사로 쓰이던 안성객사건물이다. 사진속 인물들은 안성의 주요인물들이었을텐데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안성최초의 도서관으로도 사용된 안성객사

안성객사는 1908년 당시 안성보통학교(현재의 안성초등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인 1931년 현재의 명륜여자중학교 자리로 해체 이전되었다.

이후 안성객사는 안성군 도서관으로 사용되는데, 아마 안성최초의 도서관으로 생각된다.

1946년부터는 명륜여자중학교 교사 중 일부로 사용되었고, 1995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당시 명륜여자중학교가 학교를 증축하면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 당시 안성문화원장 등이 중심이 되어 해체 복원의 필요성을 강조해 현재의 위치인 양복리에 복원했다.

복원되고 한동안 안성객사에서는 향망궐배(向望闕拜)행사가 재현되고, 전통 혼례식장으로도 사용되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금번 취재를 위해 찾아간 안성객사는 창호지도 찢긴채 방치되어 있는 등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시민들의 이용도 뜸한 모습이었다.

아쉬운 대목이다. (다음호에 계속)

복원된 안성객사에 걸려 있는 백성관현판, 글씨는 지금은 고인이 된 최병찬 전 안성문화원장의 글씨다.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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