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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꼬다리 만들었고, 명륜천이 흐르던 동네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50] : 안성시 명륜동 ⑤

기사입력 2017-05-21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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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명륜동 다섯번째 기사를 싣는다.


불에 탔었다는 느티나무.

현재 안성향교는 전교와 유도회장을 비롯해 40여명의 전교로 구성되어 석전대제는 물론이고 장학사업과 기로연, 서예전시회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안성향교의 계획과 관련해 김학승 전교와 김상배 고문은 올해 5-6월경에 교육관을 착공해 교육관이 완공되면 명륜대학을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예산은 확보된 상태로 이를 통해 한문교육과 예절 교육 등을 통해 후진양성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향교의 입장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전통과 예절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생각하고 배우고 실천하려 했던 조상들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계승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안성향교 김학승전교(1942년생, 오른쪽)와 김상배고문(1943년생).

3개의 절이 남아 있는 명륜동

한편 지난 2004년 안성향교 앞으로 도로가 개설되며 당시 안성향교 인근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2005년에 발행된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이 주로 출토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 기와 조각도 출토된 바 있다.

또 향교가 있어 생긴 마을인 명륜동이지만 현재 비봉산에 있는 약수사와, 법계사, 영령사 등 몇 개의 절이 있다.

약수사(藥水寺)는 안성시 문화유적 분포지도에 의하면 원래 작은 절이 있던 곳에 약 60년전에 새로 지은 절이고, 영령사(永靈寺) 역시 원래 절이 있던 곳에 1947년 박성규라는 사람이 새로 지은 절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령사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배례석이 남아 있다.

법계사 연혁이 기록된 자료.

법계사 창건을 주도한 유해진 교장

법계사(法界寺)역시 안성시 문화유적 분포지도에 따르면 원래 절이 있던 곳에 들어선 사찰이라고 하는데, 사찰 주지인 도윤스님을 만나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법계사는 1969년 창건된 사찰인데 당시 창건을 주도한 사람은 교육자로 교장을 역임한 유해진 교장이었다고 한다.

불심이 깊고 후사가 없던 유해진 교장이 은퇴하고 정법도량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당시 사찰 창건비용 100만원은 25만원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안성사람들의 성금으로 충당했다.

유해진 교장은 당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인사할 정도로 안성사람들에게 신망을 받았는데, 눈이 안 좋아 인사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그냥 형식적으로 상대에게 인사하는 것이 싫어 땅만 보고 다녔다고 한다.

유해진 교장은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을 정리해 도윤스님에게 남겼는데 도윤스님은 그 자료를 정리할 계획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인 1970년대에 법계사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도윤스님이 기억하고 있는 명륜동 사람들은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데, 그 어려운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법계사 도윤스님이 사찰연혁과 관련된 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던 동네

그런 도윤스님의 기억은 다른 주민들의 기억과 비슷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비봉산과 안성향교가 자리 잡은 명륜동은 안성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적지 않은 마을이다. 그런데 주민들의 삶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명륜동은 다른 동네에 비해 면적이 작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은 얼마 되지 않았다.

즉 산이 많았기 때문인데, 그나마 농사지을 만한 평지의 땅도 흙은 모래 성분이 많은 마사토였기 때문에 농사짓기 좋지 않은 흙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나온 말이 녹두밭 웃머리라는 말이었다.

다른 마을에서 이야기 했듯이 녹두밭 웃머리는 가뭄에 강한 녹두를 심은 밭보다 더 심하게 가뭄을 타는 동네라는 뜻으로 심하게 가물거나 땅이 좋지 않아 농사짓기 힘든 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농사로 생계를 잇던 시절 가뭄이 심하고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다는 것은 말그대로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다.

그래서 녹두밭 웃머리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살던 동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명륜동은 어려운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던 동네다.

비봉산에 있는 약수사 표지석.

담배 꼬다리만들던 동네

지금 명륜동에는 한국전쟁 무렵부터 살던 주민을 만나기는 힘들다.

인근 다른 마을 주민 등의 기억 속 명륜동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인데, “백동연죽을 만들던 집이 여럿 있었다고 기억했다.

백동연죽백동으로 만든 담뱃대를 말한다. 안성의 연세 높은 주민들은 담뱃 꼬다리라고 표현한다.

담배 꼬다리는 1-2사람이 수공업으로 비교적 간단한 장비를 가지고 만들 수 있었다고 하는데 명륜동 등에 만드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주민들이 주로 생계수단으로 삼은 것은 날품팔이 등인데 그마저도 마땅치 않았고, 또 다른 생계수단은 나무를 파는 일이었다.

땔 나무가 귀해 길에 나무하나 떨어져 있어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주워 다가 때던 시절, 명륜동 사람들은 옥정리 등에서 나무꾼들이 가져온 나무를 사서 얼마씩 붙여 시내에 내다 팔었다고 한다.

그나마 시내가 가까워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으로 얼마나 돈벌이가 되었을지도 의문이다. 그만큼 돈벌이 수단이 귀했고 어려웠다는 반증이다.

명륜동에서 가장 오래 산 마을주민인 이중석(84).

비봉산 물은 흘러 안성천으로 흐르고

현재 마을에서 최고령이고 가장 오래 살고 있는 주민은 이중석(84)씨인데, 24살 때 진천에서 이주해와 살고 있다.

당시 명륜동의 가구 수는 40여 가구로 기억했는데 그 중 상당수는 향교 땅에 지은 무허가 건물이었다고 한다.

비봉산에서 여러 물줄기가 내려와 물은 비교적 풍부한 편이어서 현재 명륜연립이 들어선 자리 인근에는 큰 움벙(웅덩이)이 있었고, 식수로 사용하는 샘도 여러 개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복개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개울물의 물고랑이 깊고, 여러 갈래여서 물난리는 없었다. 이 물줄기는 금산사거리를 거쳐 안성천으로 흘러갔다.

명륜동 안성향교 인근에는 적게 잡아도 수백 년 이상 된 고목들이 있는데 그 중 한그루는 언젠가 불에 타는데 며칠을 타도 다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또 방송인을 유명한 이상벽씨 고향이 명륜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명륜동의 이야기는 이웃한 구포동이나 숭인동과 이어진다.

구포동과 숭인동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을 곳곳을 안내해 준 고경철(59), 큰 움벙이 있던 자리를 설명해 주었다.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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