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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적으로 명당자리, 유사사례 없는 풍화루가 있는 안성향교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49] : 안성시 명륜동 ④ 안성향교

기사입력 2017-05-14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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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명륜동 네번째 기사를 싣는다.


안성향교 풍화루, 전국의 어느 향교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건물이다.

박승육과 박화병의 이름이 나란히 등장하는 기문.

다양한 안성향교의 기문(記文)

안성향교는 역사가 오래고, 교육기관으로서 또 지역 여론 형성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여러 기록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 대부분의 기록은 사라졌다. 특히 197612월 문헌자료와 소장된 책들 대부분을 도난당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남아 있는 고문서는 주자대전(朱子大全)”자치통감(資治通鑑綱目)”이 일부 남아 있고, 1910년부터 2005년에 이르기까지 향교에서 진행한 석전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도기”(到記)가 있다.

향교에는 청금록”(靑衿錄)이라 해서 그 지역 선비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책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 안성향교에는 이 책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남아 있는 도기는 그 시대 안성의 인물상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생각된다.

이런 자료들과 더불어 안성향교에는 다양한 기문(記文)이 남아 있다.

어떤 사실을 기록하거나, 건축물을 새로 짓거나 고칠때 신축기나 중수기 등을 쓰는데 이를 기문이라 하는데 불행중 다행으로 안성향교에는 기문 26개가 현판에 쓰여 남아 있다.

안성향교에 남아 있는 기문 중 25개는 모두 향교나 부속건물을 고치면서 지은 중수기(重修記)이고 나머지 하나는 순영감결(巡營甘結)이다.

순영감결은 대원군이 지방향교가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1871년에 내렸던 교시다. 경기도 25개 향교중에서 안성향교에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이다.

기문을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가장 오래된 것이 1872년의 중수기이고 일제강점이 시작되는 1910년전까지의 중수기가 6개다.

일제강점기의 중수기가 10개로 가장 많고, 해방이후 2006년까지 쓰여진 중수기가 9개다.

기문은 모두 명륜당 대청마루 사면과 대들보에 걸려 있는데, 한자로 쓰여 있어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만 안성향교지(2006)에 이를 번역한 내용이 실려있어 참고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1871년에 내렸던 교시.

중수기에 남아 있는 흥미로운 흔적

앞에서 이야기한 25개의 중수기에는 중수당시의 향교 임직원 이름과, 중수기를 쓴 사람의 명단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인물들에 대한 연구만 제대로 되어도 안성역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수기 3개 즉 1872, 1883, 1893년에 제작된 중수기에는 목수(木手), 와장(瓦匠), 화공(畵工) 등 실제 현판을 제작한 기술자들의 이름도 함께 기록해 놓았다.

흔히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조선은 양반을 중시하고 기술자와 상인을 천시하였다고 인식되는 점에 비추어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이 당시 안성향교에만 나타난 현상인지에 대해서는 더 살펴보아야겠지만 학문을 통해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히겠다는 당시 유학자들의 사람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반면 그 이후 만들어진 중수기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제외되어 있다. 계승되어야 할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생각이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의 중수기에서도 흥미로운 기록이 발견되는데 당시 안성향교의 직원(直員, 지금의 전교)는 박승육(朴承六)이었다.

그런데 글을 쓴() 사람은, 다름아닌 박승육의 둘째 아들 박화병(朴華秉)이었다.

석정동에서 박승육과 박화병에 대해 소개했고, 박화병이 서도(書道)로 유명했다고 했는데, 그 필적이 안성향교에 남아 있는 것이다.

명륜당의 행사준비 모습.

풍수적으로 명당에 위치한 안성향교

앞에서 조선시대에 풍수적 논리가 읍치(邑治)의 위치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고 했는데, 향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예외가 아닐뿐더러 옛 지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고을의 진산 아래, 풍수적으로 명당자리에 향교가 위치한다.

안성향교 위치의 풍수적 해석에 대해서는 도기동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즉 안성향교 자리가 씨암탉(비봉산)이 품고 있는 알() 자리이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도기동에 탑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안성향교 김학승 전교(1942년생), 김상배 고문(1943년생)도 안성향교 자리가 명당자리가 틀림없다고 이야기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뒤로 안성의 진산인 비봉산이 있고, 앞으로 안성천(조선시대에는 영봉천, 혹은 남천이라고도 불렀다)이 흐르고 멀리 청룡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안성향교가 위치했다.

이러한 풍수적 해석이 아니더라도 안성향교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절 읍치에 있던 건물 중 유일하게 제자리에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는 건물로 건물 자체가 의미가 있다.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 27호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석전대제 장면.

전학후묘의 배치에 풍화루가 있는 안성향교

향교는 여러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이는 향교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는 것인데 즉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에게 제사지내는 공간과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나뉜다.

제사지내는 공간은 대성전과 동무(東蕪), 서무(西蕪), 내삼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교육을 위한 공간은 명륜당과 동재 및 서재, 풍화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제사를 위한 공간을 앞에 두느냐 혹은 뒤에 두느냐를 가지고 '전묘후학'(前廟後學) 혹은 '전학후묘'(前學後廟)라고 이야기한다.

평지에는 전묘후학을, 경사진 곳에서는 전학후묘 양식을 취하는데 어느 것을 따르든 제사지내는 공간을 교육하는 공간보다 우선시하는 배치다.

안성향교의 경우 비봉산 아래 기슭에 위치했으므로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즉 대성전을 비롯한 제사 지내는 공간이 뒤에, 명륜당을 비롯한 공부와 관련된 공간이 앞에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를, 동무와 서무에는 그 밖의 성현들의 위패를 모셨으나 1949년 유림들의 결의로 모두 대성전으로 옮겨 모시게 되어 안성향교도 이를 따르고 있다.

명륜당 앞에 있는 동재와 서재는 당시 공부하던 학생들을 위한 숙소로 오늘날로 말하면 기숙사다.

안성향교 건물에서 이구동성으로 꼽는 특징은 풍화루”(風化樓).

풍화루는 정면 11칸의 누각(樓閣)으로 안성향교에는 출입문인 외삼문이 없어 향교 출입도 이 누각 아래에 설치된 통로를 통해 하게 되어 있다.

또 풍화루의 지붕은 동재, 서재 건물과 이어져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전국의 향교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이 향교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이 누각에서는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강학은 물론이고 향음주례나 기로연 등 행사를 했을 것이다.

안성향교 입구 하마비, 원래위치는 이 자리가 아니다.

현재 안성향교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이 하마비는 원래 위치는 다른 곳인데, 그곳에는 하마비가 있었다는 표지석이 서 있을 뿐이다.

하마비는 말 그대로 이곳에서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뜻으로 향교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호에 계속)

안내판에 새겨진 안성향교 전경.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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