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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5-08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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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을 지키고 안성의 풍요와 번성을 기원하던 신성스러운 곳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47] : 안성시 명륜동 ② ‘비봉산’

기사입력 2017-04-30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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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명륜동 두번째 기사를 싣는다.


백봉강두라는 싯구의 소재가 된 흰 바위, 옆에 보이는 것은 측량 삼각점.

장수바위 인근 바위에는 장군암이라는 글자 이외에도 여러 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화서학파 인물인 확재 홍대헌(洪大憲, 18371877)과 경헌 강복선(姜復善, 18521891), 그리고 익와(益窩) 도형묵(18441878) 이 남긴 글이다.

이들 글과 인물에 대해서는 각각 보개면 이전리와 서운면 청룡리, 현수동, 당왕동 등에서 소개한바 있다.

여기서는 안성시지(2011)에 소개되어 있는 글자의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홍대헌이나 도형묵, 강복선은 모두 화서 이항로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따랐기 때문에 화서학파로 불리웠는데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을 주도했다.

홍대헌이 쓴 봉비천인이라는 암각명과 강복선이 쓴 알욕존리, 존화양이옆에는 작은 글씨로 숭정오계유추라는 글을 쓴 시점과 글쓴이가 기록되어 있다.

도형묵의 굴기

도형묵이 쓴 굴기에는 글을 쓴 시점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모두 1873년 가을에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봉비천인봉황처럼 천 길을 날아라라는 뜻이고 알욕존리 존화양이욕심을 버리고 도리를 따라 조선을 지키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라는 뜻이다.

굴기벌떡 일어나라는 뜻으로 모두 당시 조선의 상황과 관련해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우국충정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안성의 화서학파와 관련된 글은 서운면 청룡사 정상 인근에 류중교 선생이 도형묵에게 써 줬다는 탕흉대라는 글도 남아 있다.

홍대헌의 봉비천인

안성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셨던 성황사

비봉산과 그 자락인 명륜동에는 조선시대에 향교를 비롯해 사직단(社稷壇), 여단, 성황묘(城隍廟)외에도 기우단(祈雨壇) 등 제사와 간련된 시설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18995월에 만든 안성군읍지에는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비봉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군 북쪽 2리에 있다고 했는데 성황묘의 위치가 역시 군 북쪽 2리라 했고, 나머지 향교와 사직단, 여단, 기우단의 위치는 군 북쪽 1리에 있다고 해서 모두 인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짐작조차 하는 사람도 남아 있지 않지만 다행히 현재 향교가 남아 있어 향교 주변에 이들 시설들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시설들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먼저 비봉산 내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황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황사(城隍祠)’군 북쪽 3리 지점에 있다고 하여 명칭과 위치가 1899년 안성군읍지와 다르게 나타나지만 크게 보아 비봉산내에 성황사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민간에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성황당 혹은 서낭당이 있었다면 군읍에는 군읍의 수호신을 모신 성황사 혹은 성황묘가 있었던 것이다.

성황사, 혹은 성황묘는 고을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며 그 고을의 호족이나 호족의 후예들이 일정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고려시대에는 읍치의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자 제사처였다고 한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국가체계에 흡수되면서 제사의 주체가 지방관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현재까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안성의 성황사에서 모셨던 수호신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진바 없다.

강복선의 암각명 알욕존이 존화양이

사직단과 여단 그리고 기우단

사직단과 여단은 고려시대에는 없었지만 조선 태종(재위: 1401-1418) 때 명나라의 제도를 본따서 전국 모든 고을에 일률적으로 설치하여 지방관의 주관 아래제사를 지내도록 한 제단이다.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농경사회에서 토지와 곡식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종묘사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자체를 상징하기도 했다.

여단은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주인이 없는 외로운 혼령에게 제사 지내던 곳이고 기우단은 가뭄이 들면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원하던 제단이다.

이들 시설들이 모두 특별한 건축물의 형태가 아니라 간단한 제단의 형태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때문인지 지금은 그 흔적도 볼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인 192778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비봉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어 이 무렵까지 기우단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결국 비봉산과 그 주변은 안성군읍의 중심지로 특히 안성의 풍요와 평화를 기원하던 신성하고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원 안내도.

시민에게 사랑받는 비봉산

비봉산은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 외에도 이곳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명륜천을 이루어 금산동을 지나 안성천으로 흘러 각종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로 쓰이기도 했다.

또 비봉산 자락에는 소현리에서 소개한 바 있는 남파 홍우원 선생을 기리는 백봉서원이 있었는가 하면, 홍우원 선생의 묘가 있기도 하다.

사곡동이나 금석동에서는 석조공예가 발달했고, 기좌리에서는 종이 만드는 기술과 방각본 출판이 발달하기도 하는 등 안성의 중심산으로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비봉산에는 안성을 대표하는 시인인 박두진 시인의 묘가 있고, 비봉산에 대한 안성시민들의 애정도 각별해 비봉산에서는 안성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새해 해맞이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안성시에서는 비봉산을 시민공원으로 조성해 등산로를 정비해 놓았다.

비봉산의 등산로는 높이나 경사가 적당해 등산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어 많은 안성시민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비봉산에는 비봉약수터, 마꼴 약수터, 보개약수터 등 3개의 약수터가 있고 1981년 설치된 지적삼각점 표지가 있다.

이외에 봉남동과 봉산동에서 비봉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비봉산 일출 장면.

안성팔경 중 첫 번째로 꼽힌 비봉산의 아침 해

비봉산은 이처럼 예로부터 중요한 의미였을 뿐만 아니라 안성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만큼 시인묵객들도 비봉산과 관련된 시를 남겼을 터인데, 여기서는 안성기략(1925)에 실린 안성8경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포산 권중환이라는 사람의 시로 소개되어 있는데, 권중환 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달리 알려진 바 없다. 권중환은 안성팔경중 첫 번째로 비봉산에 돋는 아침 해를 꼽았다. 원래는 한시(漢詩)인데 여기에는 지난 2007년 안성맞춤 박물관에서 특별전시회를 할 때 소개된 번역된 시를 소개한다.


비봉산에 돋는 아침 해
흰 비봉산 봉우리에 흰 봉황이 우니
봉우리에 가득찬 좋은 기운이 안성을 휘감고
봉황이 떠난 후 소식 없으니
변함없는 봉우리엔 아침해가 밝구나


이시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또 해석하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터인데 싯구 중 흰 비봉산 봉우리백봉강두”(白鳳岡頭)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비봉산 팔각정에 가면 흰색 바위돌들이 삐죽이 올라온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이 싯구의 소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비봉산 팔각정 인근에서 바라본 안성시내.

비봉산의 높이는?

비봉산과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비봉산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나 조사는커녕,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비봉산과 관련해 소개된 글에서 가장 기본적이라고 해야 할 산의 해발 높이가 다 제각각으로 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안성시지(2011)는 다양한 연구결과를 소개하면서 비봉산과 비봉산성에 대한 이해를 높였지만 산의 높이에 대해서는 278, 277.9, 277.8m, 229.5m, 227.8m로 곳에 따라 제각각으로 표기했다.

또 해발 높이를 가장 먼저 소개한 안성기략(1925)에는 230m로 소개되어 있고, 안성군지(1990)에는 곳에 따라 224m230m라고 표기해 혼란을 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안성시가 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등산 안내도에는 229.5m로 표기되어 있다.

저마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표기해 놓은 것 같은데 한시바삐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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