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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5-08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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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유물과 신라유물이 나오는 안성의 진산 비봉산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46] : 안성시 명륜동 ①

기사입력 2017-04-2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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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명륜동 첫번째 기사를 싣는다.


▲  1842년에서 1843년 사이에 간행된 경기지속에 포함된 안성지도, 비봉산과 향교가 보인다.

안성시내, 혹은 안성읍내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했어야 하는 것이 비봉산(飛鳳山)일 것이다.

지금도 비봉산에 오르면 안성시내 전체를 볼 수 있고, 등산로도 험하지 않아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쉼터로 사랑받고 있기도 하지만 비봉산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비봉산 주변에는 명륜동뿐만 아니라 사곡동, 당왕동, 봉남동, 봉산동, 가사리, 기좌리 등 안성의 많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봉산을 명륜동과 관련해 소개하는 것은 비봉산으로 향하는 주된 등산로가 명륜동에 있고, 명륜동에 위치한 안성향교가 비봉산 자락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앞에 조선시대 안성의 주요 행정기관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명륜동에서 비봉산을 소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비봉산은 안성을 다룬 여러 읍지(邑誌, 조선시대 각 읍을 단위로 하여 작성된 지리와 역사, 행정 등에 대해 기록해 놓은 책)에서 한 결 같이 안성의 진산(鎭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봉산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돌로 쌓은 흔적, 삼국시대 석축의 흔적으로 생각된다.

안성의 중심 역할을 하는 비봉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대표적인데 비봉산(飛鳳山)은 군 북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인데 옛 성터가 있다는 것이다.

한 마을이나 고을의 중심이 되는 산을 뜻하는 진산이라는 개념은 조선시대에 적용된 풍수적 논리에서 온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발행한 고지도를 통해 본 경기 지명 연구”(2011)에 실려 있는 고지도와 지리지 속에 담긴 경기도 고을의 역사와 읍치 이해”(이기봉)에 따르면 고려전반기까지 지방도시인 읍치(邑治, 고을을 다스리는 중심지, 동헌 등 관아건물이 있는 곳)의 중심은 300m미터를 넘지 않으면서 고을 대부분이 보이는 산에 돌로 만든 산성에 위치했다.

그러나 산성에 위치했던 읍치는 고려 중반 이후 방어에 적합하지 않고, 지방호족 세력의 거점이라는 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산이 아닌 평지에 위치하게 된다.

안성의 경우에도 비봉산의 서쪽자락인 사곡동쪽에서 고려 초에 현재의 안성초등학교 인근으로 읍치가 옮겨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시대에는 풍수적 논리가 읍치의 위치에도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석정동에서도 백호봉이라는 지명을 이야기했는데, 이것도 비봉산을 진산으로 보았을 때 좌청룡, 우백호라는 풍수적 맥락에서 나온 지명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지도를 보더라도 비봉산은 항상 안성의 중심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산이 있다는 것은 그 산을 중심으로 그 고을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 있다는 것으로 진산이라는 표현 자체에서 비봉산이 갖는 의미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초에 만들어진 해동지도에 표현된 비봉산과 향교.

둘레가 1,656m인 비봉산성

또한 비봉산의 경우 진산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조선시대보다 더 중요한 산이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읍치가 포함된 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동헌과 관아 등 행정기구가 비봉산에 있었다.

구체적으로 백성군이라는 이름을 쓴 200년간 백성읍의 읍치는 사곡동 쪽 비봉산 자락에 있었을 것을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사곡동에서 소개한 바 있다.

비봉산성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보다 엄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비봉산성에 대해 읍지에서는 군의 북쪽 2리에 위치해 있고 둘레가 2리라고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학계의 조사결과(안성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9년 발행)와 안성시지(2011)에 의하면 비봉산성은 비봉산의 남쪽 봉우리 일대에 축조된 산성이다.

크게 내성과 중성, 외성의 3중성으로 이루어졌는데 내성은 장군암 주변을 중심으로 전체 둘레가 714m로 테뫼식(마치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것처럼 산의 8부 능선에 원형으로 성벽을 구축한 산성) 석축성이다.

중성은 시청 뒤쪽 봉우리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는데 전체둘레가 694m인 테뫼식 토축성이다.

외성은 내성과 중성에서 확대해 만든 포곡식 산성(포곡식산성은 성내에 1개 또는 그 이상의 계곡을 포용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만든 것으로 불규칙적인 형태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으로 외성의 전체둘레는 내·중 성벽을 포함하여 1,656m이다.

성내 부대시설로는 문이 있었던 곳 3개소와 장대지 1개소, 건물지 5개소 이상 확인되었다.

비봉산에서 발견된 본피글자가 새겨진 기와.

백제유물 출토 본피(本彼)’명 기와에 관심

안성시지에 의하면 성내부에서는 5세기 이전 백제유물을 포함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유물의 종류는 기와류, 토기류, 자기류 등인데 내성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주로 발견되고, 중성과 외성에서 고려시대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내성이 먼저 만들어지고 고려시대에 중성과 외성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 유물이 출토되는 것에 대해 안성시지는 산성의 첫 축조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최근 도기동 일대에서 백제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는 것과 관련해 앞으로 추가 조사나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안성시지는 비봉산성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막새기와를 비롯한 기와류가 대부분이라서 많은 건물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

비봉산성에서 발견된 유물 중 학계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이 본피”(本彼) 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다.

본피는 삼국사기 등에 등장하는 신라의 6부 중 본피부(本彼部)’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비봉산성에서 출토된 경위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신라의 유력한 귀족과 안성의 관계, 신라의 안성 지역 지배와 관련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이지만 앞으로 연구를 통해 풀어야 할 문제 중 하나다.

장군암이라고 새겨진 비봉산 장수바위.

민첩하고 신통력을 가진 젊은 장수가 활약했던 비봉산

이처럼 비봉산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비봉산에 전해오는 전설을 통해서도 이해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장군암이라는 물증까지 남아 있는 장군과 관련된 전설이다.

도기동과 아양동에서 일부 소개한 바 있는 민첩할 뿐만 아니라 신통력을 가진 젊은 장수와 관련된 전설이다.

아양동에서 전해오는 장군과 관련된 전설은 이미 소개했듯이 실수로 아양미륵의 머리를 건드려 죽음을 당하는 비운의 인물로 젊은 장수가 그려진다.

그러나 안성군지(1990)에 소개된 그 전설에 등장하는 내용만으로도 그 젊은 장수는 비봉산에서 뛰어 알미산을 한 발로 밟고 다시 뛰어 올라 도구머리(도기동 탑산)에 두 발을 사뿐히 내려 놓으며 안성천을 건널 만큼 민첩성과 축지법을 가지고 있었고 신통력도 있었다. 그러니 정말 펄펄뛰고 훨훨 날아다니며 싸울 수 있었다. 그 젊은 장수 앞에 적이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곤 도망가서 숨어 버리는 수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비봉산에는 장군암”(將軍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장수바위가 남아있는데 아주 깊게 새겨있다.

안성군지에 의하면 그 장수바위는 장수가 누웠던 자리며, 인근에는 칼을 놓아두었던 자리도 있다고 하는데 어디쯤인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삼국시대, 혹은 고려시대 언젠가 비봉산과 비봉산성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그 젊은 장수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 (다음호에 계속)

해동지도 보다 늦은 1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여지도에 표현된 비봉산과 향교.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지승에 표현된 비봉산과 향교.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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