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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5-08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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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대장 김동식장군 고향이자 유기 숟가락 공장 등 가내수공업이 발달했던 마을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44] : 안성시 석정동 ⑨

기사입력 2017-04-09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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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석정동 아홉번째 기사를 싣는다.


석정동 주민들.

항일 독립전쟁의 영웅 의병대장 김동식 장군의 고향

석정동과 관련해 잊지 말아야 할 인물이 있다.

의병대장 김동식(金東植, 18541909)이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대한제국 말기, 전국 각지에서 의병전쟁이 일어나는데 안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안성에서는 190511월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로 하여 활발한 의병활동이 전개된다.

이 때 전개된 의병전쟁의 경우 다른 지역 출신이 안성인근에서 활약한 경우도 있고, 안성인물이 안성주변에서 활약한 경우도 있고, 안성출신이 다른 지역에서 활약한 경우도 있다.

특히 안성출신으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로 각종 백과사전에도 소개되어있고, 안성시지(2011)에도 소개된 인물이 김동식 의병대장인 것이다.

안성시지에 의하면 김동식 대장은 190781일을 기하여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켜 순창, 임실, 진안, 용담 등 전라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런데 백과사전이나 안성시지에는 김동식 장군이 안성출신으로만 기록되어 있을뿐 안성 어느 마을 출신인지 특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김동식 대장이 태어나 자란곳이 석정동이다. 뿐만 아니라 김동식 대장의 호가 석정리라는 마을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되는 석정”(石井)이다. (김동식 대장의 고향이 석정동임을 일깨워 준 것은 안성향교 김상배 고문이다. 김상배 고문이 아니었으면 김동식 대장을 소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성출신의 의병대장 김동식 장군 이야기를 다룬 책 항일독립전쟁의 영웅 김동식 장군

안성군민 300명과 함께 지리산으로 가서 활약한 김동식 대장

이같은 사실은 성균관장을 역임한 서정기 선생이 엮은 항일 독립전쟁의 영웅 김동식 장군”(2001)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김동식 장군은 경주 김씨로, 일찍부터 가족들과 피난행군을 연습하는가 하면, 칠장산에 들어가 생식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안성유기공장의 제품을 전국에 보급하는 도매상점을 열기도 했다.

이렇듯 일찍부터 외세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던 김동식 대장은 19078월 안성에서 열린 의병대장들의 민군회의(民軍會議)에 참석하여 진로를 논의하는가 하면 안성군의 관아를 접수했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습격으로 후퇴하게 되자 김동식 대장은 아들 봉환(鳳煥)과 함께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이후 김동식 대장은 지리산을 거점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여러 의병장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190912월 자결로 생을 마쳤다.

1970년대(?) 안성농협 창고, 안성농협 창고가 현재의 내혜홀 광장인근에 있었다고 한다. 이 사진 속 농협창고로 추정된다. (사진출처 : 근현대 안성의 도시건축)

한국전쟁 때 피난민이 모여 살던 마을

이처럼 석정동은 이야기 거리가 많고 자료도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동네다.

래서 더욱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많이 듣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

남아있는 자료와 주민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석정동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논과 밭이 더 많은 마을이었고, 그래도 주민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했던 곳이 지금의 돌우물 공원 근처부터 백성초등학교 인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금산동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기도 한데, 금산동을 이루는 지역 일부는 원래 석정동이었지만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시 금산동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당시 마을 모습을 기억하는 주민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이야기중 하나는 수용촌과 관련된 이야기다.

현재의 백성초등학교 아래쪽에 형성된 마을을 이야기하는데 주민에 따라 석정동이라는 주민도 있고 금산동이라고 하는 주민도 있다.

수용촌이라는 지명의 마을은 대부분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물레방아가 있던 마을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전쟁 등으로 인해 생긴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마을을 뜻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석정동과 금산동 경계의 수용촌은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을 수용했던 곳으로 방 한칸과 부엌만 붙어있는 사방 6자짜리 집 50-60채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새라고 했다.

지금도 일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1971년의 제일장로교회와 상가.(사진 출처 : 안성제일교회 80년사)

가내수공업이 발달했던 석정동

또 당시의 석정동은 리어카 한 대 겨우 드나들 정도의 좁은 골목길이었고 곳곳에 가내 수공업 공장이 있었고, 제법 큰 유기공장도 있었다고 한다.

가내 수공업 공장은 담뱃대를 만드는 공장과 유기 숟가락 만드는 공장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유기 숟가락 만드는 공정은 비교적 간단해서 3-4명이 만들 수 있었다고 하는데 약 20-30년간 유기숟가락 공장을 경영한 이만제(1930년생)옹을 만나 관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유기 숟가락은 구리가 3/4, 납이 1/4, 유기중에서 가장 좋은 쇠로 만드는데 방짜 방식으로 즉 두들겨서 만들었다고 한다.

좋은 납을 구하기 위해 서울로 가고, 석탄은 문경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어서 유기는 삼베와 바꿨다고 하는데 자본이 부족해 재료를 구입하지 못해 미리 만들어 놓지를 못하니까 성수기에는 늘 일손이 부족해 주문량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유기 만드는 기술자들의 임금은 일반 노동자 품값의 세배정도 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 석정동의 숟가락 공장은 6개쯤 되었고 유기공장도 10개 이상 되었다는 것이 이만제 옹의 기억이다.

특히 현재 민속촌에서 유기 만드는 시범을 보이는 사람이 석정동 출신이라고 했다.

1982년의 제일장로교회와 상가, 옆으로 버스터미널의 버스가 보인다.(사진 출처 : 안성제일교회 80년사)

1970년대 이후 제일장로교회

석정동이 고향인 양장평 문화원장은 제일장로교회와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예배당 종이 4시에 울리는데, 그 시간을 기준으로 해서 타작을 시작한다.

그런데 일손이 부족하면 주인이 꾀를 내어 예배당 종이 안 울렸다고 하면서 밤 12시 혹은 1시부터 일을 시작한다. 그러면 아무리 일을 해도 날이 안밝고, 예배당 종소리가 울린다는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박봉양 원로목사는 1972년 부임해 1994년까지 제일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한국기독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박봉양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경찰서 형사가 교회에 살다시피 하면서 설교를 녹취했고, 사찰했다고 한다.

198280주년을 맞아 80년사를 편찬하는 한편 신도들을 중심으로 한 비영리 금융기관인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했다. 1990년대에는 매일 사랑의 국수집을 열어 인근 노인과 불우이웃에게 점심을 제공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100주년을 기념하여 석정동 3번지 교회 터를 매각하고 석정동 328번지에 1,725평을 구입해 2005년 새성전 건축기공에 들어가고 2006년 완공된다.(다음호에 계속)

지난 2008년 석정동에 들어선 대형마트.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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