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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5-08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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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폭격에 애원극장 부서지고... 한국 전쟁 후 안성에서 가장 오래되고 훌륭했던 기와집이 있던 동네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43] : 안성시 석정동 ⑧

기사입력 2017-04-02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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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석정동 여덟번째 기사를 싣는다.


1956년경 안성제일장로교회에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일죽면의 이찬재(1928년생)옹이 젊은 시절 참석한 결혼식 사진이다. 사진 위쪽에 장노교 안성교회라는 글이 보인다.(원안)

잊혀져가는 인물 목욱상

일제 강점기 석정동에 살았던 인물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인물이 또 있다.

먼저 일제강점기 박필병에 이어 도평의회 의원을 지낸 목욱상(睦頊相)이다.

목욱상의 경우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은 올라 있지 않지만 일제 강점기 안성면협의원을 역임했고, 박필병에 이어 경기도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사업가로서 주로 양조(釀造)회사에 많이 관여했는데, 안성읍내뿐만 아니라 죽산, 평택에서도 활약했다.

당시 신문에 지략이 비범한 사업가이자 탁원한 수완을 가진 인물로 소개되었다.

나이는 1940년 신문기사에 불혹으로 소개되었고, 392월 안성군 지원병 후원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애국경기호헌납기성회 집행위원도 역임했다.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도 일제 강점기 안성에서 차지한 비중이 적지 않은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안성에서 목욱상을 기억하는 인물들은 많지 않고 해방이후의 행적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몇 몇 목욱상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은 박필병은 그나마 농업학교라도 남겼지만 목욱상은....”이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대체적으로 평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석정동에는 그런 목욱상이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다.

집터는 굳게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문틈으로 보이는 현재 남아있는 터의 크기도 클 뿐 아니라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아주 크고 좋은 기와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앞으로 목욱상에 대한 더 많은 기억과 자료의 발굴로 좀 더 많은 논의와 평가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목욱상을 소개한 1940년 동아일보 신문기사.

안성체육계의 거물 박용복

석정동에 살았던 인물 중 주민들이 기억하는 또 다른 인물이 박용복(朴容復)이다.

박용복은 앞에서 소개한 박필병의 차남으로 장남이 일찍 죽은 후에는 장남 역할을 했다.

당시 신문기사와 안성공원에 있는 박용복의 공로비, 그리고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용복은 당시 일본 유학까지 가서 동경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안성에서는 1920년대에 청년회 활동을 하기도 했고, 신간회 활동도 했다.

당시 신문에는 실업계(實業界)의 중진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박용복이 관심을 가졌고, 열심히 활동한 것은 체육과 관련한 활동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안성정구 구락부장, 안성체육회 집행위원장, 안성체육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고, 안성읍회 의원도 역임했다.

일제 말기에는 징병을 독력하기도 했다.

현재 안성공원에는 1964년 세워진 고 밀양박공 용복씨 체육공로비가 남아있는데, 이 비석은 뒷면에 새겨진 내용에 의하면 안성체육발전에 공로가 큰 박용복씨를 잊지 않기 위해 49제일을 기하여 19649월에 세운 것이다.

박용복 공로비.

안성에서 가장 오래되고 훌륭했던 박용복의 집

박용복이 살았던 곳은 앞에서 말한 목욱상의 집과 인접한 곳으로 현재는 빌라가 들어서 있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그 집을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아주 큰 규모의 잘 지은 기와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집과 관련된 기록이 안성문화 금석관(1956)에 남아 있다.

안성문화 금석관에는 주택으로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것은 안성읍 석정동에 있는 박모의 주택으로 조선 정조때 좌의정 정홍순이 건축한 것이라 전해온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박모가 박용복일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집은 한국전쟁 속에서도 견뎌 안성문화 금석관에 소개된 듯한데 아쉽게 이 집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박필병의 집 등이 폭격으로 없어지면서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은 박용복의 집이 가장 크고 훌륭한 집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집주변에는 현재 신축건물 공사가 이루어지는 곳에 삼익포도원을 운영했고, 그곳에서는 박필병의 후손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 삼익 포도원의 명칭은 박필병이 창립한 삼익사에서 유래한 것 같은데 언제부터 언제까지 경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외에도 주민과 지인들로부터 박용복과 관련된 몇 몇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사와 관련된 이야기라 이곳에서 소개하지는 않는다.

박용복 집터에 들어선 빌라.

한국전쟁으로 얽힌 애원극장과 제일장로교회의 인연

애원극장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당시 매우 잘 지은 건물로 붉은 벽돌을 자재로 했었다.

그런데 폭격으로 애원극장이 파괴된 후 부서지고 남은 붉은 벽돌은 인근 가난한 주민들이 가져다가 움막을 짓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한국전쟁당시 안성에서 UN군 폭격으로 파괴된 것은 애원극장만이 아니었다.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서 여러 곳이 폭격 당했음을 알 수 있는데 같은 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와 관련해 안성제일교회 80년사에는 주목할 만한 기록이 남아 있다.

즉 안성제일장로교회도 당시 폭격을 당했다는 것인데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다. 195077일 역시 유엔군의 폭격으로 기존 제일교회의 예배당, 목사관, 유치원 사옥을 포함하여 교회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는 것인데 이 날이 애원극장이 폭격된 날과 같은날인지는 불확실하다.

문틈으로 들여다 본 목욱상 집터.

미국정부와 교회가 사전 협의해 진행된 폭격

그런데 제일교회 폭격과 관련해서는 제일장로교회 관계자로부터 주목할 만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인민군들이 교회에도 모여 있어서 미국정부로서도 함부로 교회에 폭격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미국정부가 미국교회와 협상을 통해 전쟁이 끝나면 교회를 복구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안성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폭격을 당한 평택이나 수원 교회도 전쟁이 끝난 후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복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언을 뒷받침 하는 기록이 안성제일교회 80년사에 남아 있다.

폭격을 당한 후 제일장로교회는 4차례에 걸쳐 예배처소를 옮겨 다녔고, 마침내 건물터를 매입하게 되는데 그 매입한 건물터가 애원극장이 있던 자리다.

당시 애원극장터는 물론이고 인근에도 박형병의 땅이 많았는데 이를 제일장로교회가 매입하고 교회를 짓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던 듯하다.

어찌되었든 제일장로교회는 19529월 애원극장 건물터 988평을 매입하고 19545월 착공에 들어가 3개월만인 19548월 머릿돌이 놓여지고 1223일 입당예배를 본다.

예배당의 규모는 2180평 규모로 총 795만환이 들었다.

그리고 미국정부의 약속 때문이었는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를 통해 150만환, 미 해병 제12여단을 통해 자재로 440만환을 지원받았다고 안성제일장로교회 80년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자재를 지원해 준 것과 관련해 주민들은 당시제일장로교회는 돌로 지었는데, 그 돌은 미군이 소현리에서 캐다가 트럭으로 가져다 준 것이라고 기억했다.(다음호에 계속)

신축 건물이 들어서고 있는 삼익포도원 자리.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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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04- 02 삭제

    삼익포도원에 떡갈나무인지 참나무인지 많아 사슴벌레 잡으러 다닌적이 기억에 나네요 지금말씀하신 목욱상씨 그리고 박필병씨 또 숭인동 하모니마트자리에 사시던분 이름은 기억은 안나지만[김수영??] 집안에 분수대까지 있었고 그 아드님이 남산케이블카를 놓으셨다는분 그렇게 세분정도가 안성에 그당시 유지였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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