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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05-08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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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대전 사이에서 가장 훌륭했던 애원극장을 아십니까?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인 박형병이 요절한 동생을 위해 안성에 애원극장을 설립했다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42] : 안성시 석정동 ⑦

기사입력 2017-03-26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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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석정동 일곱번째 기사를 싣는다.


안성농업고등학교 10회 졸업앨범(1961)에 소개된 당시 학교 모습.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석정동은 일제강점기에 기차역, 농업학교, 장로교회 등 이른바 근대(近代)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다양한 기관단체 들이 들어선다.

이에 당시 안성상인들은 기존 동리와 서리 그리고 장기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안성의 중심 상권이 석정동 쪽으로 옮겨가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이런 맥락에서 석정동과 관련해서, 아니 일제 강점기 안성과 관련해서 꼭 이야기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애원극장(愛園劇場)이다.

지금은 사라져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애원극장은 당시 서울과 대전 사이에서 가장 좋은 시설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은 최신 영화상영관이자 연극 상영관으로 그 자체가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

뿐만 아니라 애원극장과 관련된 인물, 만들어지는 과정, 애원극장의 역사는 알려진 것만으로도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 흥미진진하다.

단지 흥미 진진할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안성의 이야기기기도 하다.

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관련 1929년 기사에 소개된 박형병 모습.

조선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 박형병

애원극장을 설립한 사람은 박형병(朴衡秉, 1897~?)이다.

따라서 애원극장을 제대로 알려면 먼저 박형병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박형병은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활동가로 각종 백과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고 그 내용은 인터넷을 통해 쉽게 검색될 정도다.

각종 백과사전에 설명된 내용을 중심으로 박형병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박형병은 안성이 고향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다.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192033.1운동을 기념하는 시위를 하다 검거될 정도로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에는 사회주의자들의 비밀조직인 고려공산동맹에 참여했으며 이후 다양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했고, 1927년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한다.

이후 19284월 제3차 조선공산당(일명 ML파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때 체포되어 1930년 징역 4년을 선고받고 1933년 만기출소한다.

해방 이후에는 194511월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 경기도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해 의장단의 일원이 되며, 1946년에는 당시 좌익세력의 연합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에 선임되고 경기도 공동위원장이 된다.

이 내용만보더라도 박형병이 일제강점기 안성뿐 아니라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박승육 장례식을 다룬 사진(사진 위쪽)기사.

안성에서 잊혀 졌지만 기억해야 할 박형병

그런데 백과서전 등에 소개된 박형병의 행적에는 1933년 출소한 이후 해방될 무렵까지의 행적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백과사전 등에서 누락된 1933년 신의주에서 출소한 이후 해방 될 때까지의 박형병의 행적은 그의 고향인 안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행적이 바로 애원극장 설립이다.

그런데 아쉽게 안성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박형병에 대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고 70세 이상된 어른들 중 일부에서 애원극장을 설립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박형병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활동, 특히 안성과의 인연과 안성에서의 활동을 볼 때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 기회에 잊혀 진 박형병이 다시 기억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박형병과 박형병의 가계에 대해 당시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한다.

일제강점기 안성의 거인 박승육

사실 박형병의 가계(家系)를 제대로 알 수 있다면 일제 강점기 안성 역사의 상당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박형병의 가족들이 일제강점기 안성에서 차지한 위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박필병이 당시 안성의 최고 재력가이자 실력가였다면 그에 못지 않은 재력과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박형병의 가족이다.

특히 박형병의 부친인 박승육(朴承六, 1859~1934)은 박필병에 앞서 명실공히 안성의 최고 실력자로 당시 신문에서는 장로”(長老), “원로”(元老), “거인”(巨人)으로 표현했다.

안성읍내면장(안성이 읍으로 승격된 것은 1937년이다. 읍으로 승격되기 전에 읍내면일때 9년간 면장을 했다, 관련해서 안성공원에는 1916년 세워진 박승육 불망비가 있다) 민립대학(民立大學)기성회 안성위원장, 지주소작인회장(地主小作人會長), 노인회장(老人會長), 문묘직원(文廟直員, 지금의 안성향교 전교) 등 안성의 주요 기관사회단체장을 역임했다.

박승육의 장례는 안성에서는 처음 보는 성대한 것으로 150여개의 조기, 만장, 화환이 있었고, 소방대원과 학생 등 400여명이 장례행렬을 호위했고 2,000여명이 장례행렬 뒤를 따랐을 정도로 성대했다고 한다.

박승육은 슬하에 51녀를 두었는데 5형제 중 장남 박태병(泰秉)은 한학자였지만 독립운동가 이수흥에게 피살되었고 둘째 박화병(華秉)은 글씨(書道)로 유명했고, 셋째 박숭병(嵩秉)은 중국 유학을 마치고 안성에서 삼덕 포도원을 경영했으며, 넷째가 박형병이고 다섯째가 동경에서 음악학교를 마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간 박항병(恒秉)이다.

당시 신문에서는 오형제가 모두 일대의 명인(一代 名人)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박승육과 오형제에 대해서는 한 두 줄로 요약해서 설명할 수 없는데 앞으로 기회가 되는대로 소개할 계획이다. 

박승육 장례식을 다룬 기사.

안성원에 있는 박승육 불망비
아름다운 형제애의 표현으로 설립된 애원극장

그런데 박형병이 애원극장을 설립하는 이유가 바로 동생 박항병과 관련이 있다.

1923년 신문기사에 당시 24살이던 박항병은 수년간 공부했던 동경 음악학교 성악과를 1923년 봄에 졸업하고 북경에 있다가 8월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간다.

이후 신문기사에 의하면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던 박항병은 병을 얻어 중도 귀국해 요양하다가 1928730세를 일기로 요절한다.

이에 193311월 고향인 안성에 와 있던 박형병이 요절한 동생 박항병을 추모하고 그 음악정신을 기리기 위해 박항병의 별호인 애원(愛園)을 극장 이름으로 해서 193611월 완공한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애원극장은 건축비 3만원, 설비비 2만원이라는 거액을 들인(1939년 농업학교 설립을 위해 박필병이 부담한 돈이 10만원임을 생각하면 5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안성문화 금석관(19560에는 건축비 5만원, 설치비 5만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2127평의 규모이다.

석정동 애원극장이 있던 자리, 지금은 복합상가 건물이 있다.

영화상영, 연극 공연, 강연회까지 했던 문화공간

안성문화 금석관에 의하면 수용인원은 1,3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당시 서울에서 대전까지 사이에 이 극장이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이 극장에는 박항병이 가장 숭배하던 베토벤의 초상과 박항병의 초상이 있었고, 특히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도 공연을 했는데 애원좌라는 극단까지 구성하여 각지로 순회공연했다고 한다.

애원극장은 사진도 귀한 시절 기회가 되는대로 활동사진을 상영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강연회도 열리는 말 그대로의 문화공간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

애원극장의 위치는 당시 신문에서는 석정동 안성역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조선시대 두레패가 가장 유명했던 동네에 현대식 극장이 들어선 것은 묘한 우연이다.

현재 대형 복합 상가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당시 애원극장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후에도 애원극장인근에는 인가나 상가가 없이 논 가운데에 애원극장 건물만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었단다.

이 애원극장은 해방 후에는 당시 좌익들의 근거지로 사용되기도 했고 폭격으로 없어졌다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인데 관련된 사실이 안성문화 금석관에도 기록되어 있다.

즉 한국전쟁 때 이 극장을 중심으로 부근에 수만 명의 괴뢰군이 위집하여 UN군 정찰기가 내습 폭격하여 극장이 모두 파되되었고 동시에 그 부근 가옥 560여 호도 불에 타 재만 남았다는 것이다.

이 애원극장의 사진 한 장 구하지 못해 독자들에게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쉽다(다음호에 계속)

▲ 안성농업고등학교 10회 졸업앨범에 소개된 하교 길 모습, 현재의 한경대학교 정문 인근으로 추정되는데 어느 곳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독자들의 제보를 기다린다.

봉원학 기자 bwh5722@naver.com

자치안성신문 ()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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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해라세종고속도로
    2017- 03- 26 삭제

    안성브레인이티 유치를 위해 노력하자 송전탑만 들어오게만들지말고 보개면에 안성브레인시티를 유치하라 특히 불현리에 촉궁한다

  • 사랑해라세종고속도로
    2017- 03- 26 삭제

    보개면에 극장을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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